100년 간 금지된 땅 용산…"돌려받는데도 100년"

국토부 시설활용계획 백지화 결정을 계기로 둘러본 용산공원 예정부지

40층짜리 주상복합건물 옥상의 헬리포트에 올라섰다. 난간이 없는데다 센 바람까지 불어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이 더 빠졌다.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널따란 용산 미군기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 주상복합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용산미군기지 일부 전경 (사진=장규석 기자)
"경부선 철도 옆으로 한강로가 지나가지요. 일제가 건설한 그 도로를 따라가다가 용산 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는데요 바로 그곳이 일제의 조선군 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저기 미군병원이 있는 곳이 과거 총독 관저가 있던 자리입니다." 건축사가인 안창모 경기대 교수가 취재진을 상대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25일 기자단을 상대로 용산국가공원 조성계획에 대한 설명회가 있던 날, 취재진은 공원예정부지를 둘러보기 위해 용산 미군기지 내부가 아니라 인근의 한 주상복합건물 옥상 헬리포트로 올라가야 했다.

기지 내부에 있는 일본군 시설 등 주요시설물 일부라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한미군 등에 협조요청을 보냈지만 끝내 거부당했다고 국토교통부 관계자가 양해를 구했다.

높은 옥상이라지만 아무래도 사각(死角)이 있어 위수감옥이나 막사건물 등 일본군이 쓰던 주요 시설물은 잘 보이지 않았다. 미군이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지어놓은 조악한 벽돌 건물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설명을 이어가던 안 교수는 ‘국방부 옥상이라도 올라가면 더 잘 보일텐데’하고 안타까움을 토해내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 군대가 진주한 이래, 그 땅은 '우리의 땅'이었지만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땅이었다. 100년 이상 일제에게 빼앗기고 다시 미군에게 내어 준 그 땅은 지금도 그렇게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접근이 금지된 땅, 다시 가능성의 공간으로

“공원 설계자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용산국가공원 설계자 가운데 한명인 웨스트8(West8)의 아드리안 구즈(Adriaan Geuze) 대표가 기자에게 말을 건넸다.

공원설계자 가운데 한명인 WEST8의 아드리안 구즈 대표가 용산공원 조성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장규석 기자)
아드리안은 "만약 저곳이 군사점령지로 남아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도시로 개발됐을 곳인데, 도심 한가운데 저렇게 공원을 조성할 거대한 땅이 아직 남아있는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존 건물이 있어서 바로 재활용이 가능하고, 나머지 철거한 건물도 나중에 공원의 구릉 등을 만드는 골재로 재사용할 수 있어서 비용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회한의 역사에서 자유로운 외국인 설계자의 눈에 용산미군기지는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구즈 대표는 과거 일본군 부대시설 터를 한국적인 ‘마당’으로 재설계해 다양한 공간으로 조성하는가 하면, 호숫가 옆으로 젊은 연인들을 위한 ‘철수와 영희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재기발랄한 구상을 내놓기도 했다. 마냥 아프고 슬픈 공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용산국가공원 예상도 중 일부, 코스모스가 만개한 들판 (자료=국토교통부)
그런가하면 공동설계자인 승효상 이로재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용산기지의 지하공간에 큰 기대를 나타냈다. 아직 보안문제로 조사하지 못한 지하벙커와 유류저장고 등 지하시설물이 많기 때문이다.

승 대표는 "지하공간은 건축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곳"이라며 "공원부지의 생태성을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공간에 대한 다양한 수요를 담아내는 묘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빼앗긴 100년…돌려받는데 또 다른 100년

용산공원 예정 부지는 아픔이 있는 땅이지만 어찌보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땅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안에 어떤 의미를 담아내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토교통부가 그동안 검토 중이던 시설활용방안을 백지화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다행이다. 각 정부부처들이 건물 하나씩을 차지하고 각자 박물관이며 과학관을 짓는다는 발상은 용산공원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떨어뜨리는 작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산미군기지에 남아있는 일본군 보병 78연대 건물 (자료=국토교통부)
또, 논란이 일단락되고 그 과정에서 용산공원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결정이다.

국토부도 이번에 전면재검토 방침을 밝히면서, "2027년 조성완료도 완성의 의미보다는 공원의 기본적인 틀과 토대만 마련하고 내부 내용물은 수세대에 걸쳐 계속해서 채워나가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는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

용산국가공원은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이전을 완료하는 2017년부터 본격 조성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는 앞으로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용산공원을 직접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여론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100여년 넘게 금단의 땅이었던 만큼, 그것을 돌려받는 일도 쉽지 않다. 온전히 돌려받는데 또다른 100년을 계획할 정도다. 그러나 폐쇄적으로 진행돼 왔던 용산국가공원 조성계획이 이번에 국민에게 열린 계획으로 전환됐다는 점은 큰 진전이다.

"No buildings, only green" 아드리안 구즈 대표가 악수를 청하며 한마디를 던졌다. 그의 말마따나 새로 건물을 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용산부지가 가진 역사성과 생태성을 살려나가는 일이 우리 앞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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