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는 새삼 '언론'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검찰이 지난 20일 발표한, '99% 입증 가능한 것으로만 썼다'는 공소장 내용의 다수는 언론이 자체 취재·보도를 통해 밝혀낸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수많은 언론이 경쟁하며 새로운 사실을 확보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는 '진풍경'을 반기는 반응도 많다.
23일 오후 2시 30분, 한국언론학회 주최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 '최순실 사태, 언론보도를 논하다' 세미나가 열렸다.
숙명여대 배정근 교수는 현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가 '탐사형 보도'라는 점에 주목하며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 PC 보도가 엄청난 분수령이 되어 그 뒤로 단독기사들이 연일 쏟아졌다. 언론이 얼마나 치열한 취재 경쟁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배 교수는 "사실 민주화 이후 한국 언론에서는 중요한 권력 비리가 터졌을 때 언론이 경쟁적으로 나서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비자발적인 공동 취재'를 한 경험이 있다. YS정권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이 대표적"이라며 "언론 정파성이 강해지며 어떤 매체에서 고생해서 밝힌 것을 두고 의도와 편견이 있다는 둥 무력화시키는 일이 그동안 많았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는) 그런 경향을 바꾸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을 장기적으로 이끌고 온 데 분명 언론이 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잘했다"는 칭찬을 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간 활약했던 언론은 계속 '진실 추적'을 위해 애쓰고, 주춤했던 언론은 뼈저린 반성과 자구노력을 하며, 언론생태계의 일부를 이루는 학계 역시 반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 잠잠했던 학계는 '반성'을, 언론은 '자본권력에도 날카로운 취재'를
대구대 김성해 교수는 "JTBC, 한겨레가 잘하니까 박수만 치고 있는 게 맞는가. 자연재해는 불가피하게 오지만 최순실 게이트 같은 건 철저하게 인간이, 우리 사회가 만들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초래한 것"이라며 "(거기에 기여한) 일부는 학계고 언론"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언론이 얼마나 기득권에 가까웠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일부 대안언론이 아무리 소리쳐봐야 지상파를 통해, 24시간 나오는 YTN과 연합뉴스 통해 나가는 뉴스만으로는 (국민들이 나라에)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들(언론사)이 왜 그랬는지 반성은 해 보았나"라며 "이번 기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언론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 교수는 "이번 사건의 규정조차도 저는 아쉬운 게 많다. 이것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냐 '헌법질서 파괴 사건'이냐 한다면 저는 후자라고 본다. 규정이 달라지면 다른 이슈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최순실과 정유라를 죽인다고 달라지는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미국이 '워터 게이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언론은 언론다웠고 교수는 교수다워서 각자 자리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다움'을 지금이라도 회복해야, 재생 불능 상태에 있는 헌정질서가 회복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학계의 반성' 역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론사가 학계에서 던진 이슈를 기반으로 보도를 만들어 가는데 그동안 학계는 무엇을 했나. 알고리즘 저널리즘, 데이터 저널리즘, SNS 얘기를 주로 하지 않았나. 학계가 건전한 (언론) 환경 감시 역할을 했었나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현재는 상황이 끝나지 않아 기다리는 상황이라 기울어진 운동장(보수 편향적인 언론 지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잠시 평평해 보일 뿐이다. 언론사가 앞으로도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인지를 지켜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치권력뿐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중요 축을 이루는 경제권력에 대한 날선 보도 필요성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채 교수는 "(현재 언론은) 양대 권력 중 정치권력 한쪽에만 (칼날을) 들이댄다. 자본권력에 대한 칼날은 굉장히 무디다"고 꼬집었다. 이어, "범죄자 찾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한국사회가 어떠게 나아가야 하는지, 새로운 공론장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논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제작자율성 보장 장치 강화·사장 선임 구조 개선·시청자들의 관심 필요
'몸통'인 박 대통령을 건드리는 데 몸사리고 더 무거운 '공적 책임'을 지니고 있는 공영방송임에도 비교적 소극적인 보도를 해 온 KBS·MBC에서는,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 개선과 시청자들의 폭넓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새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회 정수영 간사는 "공방위에서 김인영 보도본부장은 'JTBC 보도는 다 맞는 것처럼 하는 것, 우리 뉴스와 채널 정체성을 부정하는 시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뉴스를 운동하듯 투사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며 "왜 공영방송 뉴스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나. '청와대 의중 반영'이 사장에서 평기자까지 이어지고, 언론사 내부 자정기능이 무력화됐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정 간사는 "공정방송 감시를 가장 중요업무로 하는 노사 동수 기구 공방위를 보장하는 단체협약과, 제작 실무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편성규약이 잘 운영되어야 한다. 만약 경영진이 제작·취재 실무자의 자율성을 침해할 경우 처벌함으로써 실무자 권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또 정권에 복종하지 않는, 청와대에 빚진 것 없는 사장이 와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제작·취재 실무자 자율성을 더 강력히 보장하고 정부여당 쪽에 치우쳐져 있는 공영방송 사장 선임 구조를 개선하는 '방송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간사는 "기자로서 들어왔는데 영업하고 스케이트장을 관리하라고 해서 소송을 하면 3~4년이 걸린다. 그럼 또 다시 징계를 해 소송이 계속된다. 그러니 (직원들이) 이의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안에서 내부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피흘리는 것 말고는 (경영진의 행태를) 막을 아무런 합법적인 수단이 없다"며 "내부에서도 뼈저리게 반성하고 열심히 싸우겠다. 시청자들도 MBC를 비롯한 공영방송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실천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지금처럼 계속 취재에 매진할 것"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강제모금, 최순실 씨 이름 공개 및 각종 전횡 폭로, 최 씨 태블릿 PC 보도 등 굵직한 보도로 이슈 파이팅해 온 언론은 '지속적인 성실한 취재'를 하겠다고 밝혔다.
한겨레 김의겸 선임기자는 "권력 감시하고 보도경쟁 통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언론도 애써 눈감고 냉담하게 있어왔던 분명한 시간들이 있다. 그에 대한 성찰과 반성 없이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박근혜와 최순실을 지금 공격한다고 그 과거가 벗겨지지 않는다. 과거 성찰 없이 어떻게 한 발짝 내딛을 수 있겠나. 언론 종사자들이 지금처럼 매진해야 작은 성과라도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김명환 팀장은 "보도할 가치가 있느냐, 팩트에 맞느냐 2가지를 갖고 아이템을 선택하고, 회사로부터 전폭적이라고 할 만큼 취재자율성을 부여받고 있다. 이것이 JTBC의 큰 자산이라고 본다. 앞으로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시공간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고, 저희 프로그램에서도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TV조선 이진동 사회부장은 "그동안에도 권력비리를 많이 써 왔는데 언론노조나 미디어오늘, 기자협회보 등 일부 언론은 (TV조선 보도를) 이념적 틀 안에 가둬서 '보수정권의 재창출'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안기부 도청 X파일 보도 때도 자본의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며 "언론은 국가권력에 대한 문제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청와대-조선일보 싸움이라는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더 진전된) 보도를 막을 가능성이 높다. 언론의 정파성·당파성이 기자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부장은 "'보수 재집권'이라는 틀에서 본다면 기자들의 역할이 파편화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 언론이 언론다움으로써 언론 역할을 할 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는 게 아닌가 한다"며 "이 사건에서 더 드러나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TV조선도 열심히 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