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나마 당신이 머물렀던 세계는 당신의 짧은 생이 없었을 수도 있을 세계와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영원히 다릅니다."
신간 '죽음에 대하여'는 프랑스 철학자 장켈레비치의 '죽음 사유의 정수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프랑스 편집자 프랑수아즈 슈왑이 장켈레비치가 '죽음'에 대하여 담론한 대담 네 개를 발굴하여 장켈레비치 사후 10년 즈음에 출간한 책이다.
장칼레비치는 죽음이 지니는 위상과 의미에 따라 1인칭, 2인칭, 3인층 죽음으로 그 의미를 구분한다.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며 알 수 없는 것이다. '2인칭 죽음'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2인칭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에게도 언젠가 다가올 사건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3인칭 죽음'은 나와 무관한 죽음, 사회적이고 인구통계학적인 죽음으로, 죽음을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으로 취급한다. "이렇게 죽음을 끝없이 미루고 지연시키면서, 죽음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적인 기만"이다(31~32쪽). 그러나 죽음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자기기만은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서도 모종의 형이상학적 희망을 기대하게 한다. "죽는다는 사실의 확실함과 죽는 날짜의 불확실함 사이에 불명확한 희망이 흘러듭니다."(101쪽) '나'의 죽음은 죽음을 사유하는 데 있어 객관적 위치로서의 외부가 아니라, 궁극의 무無로서의 '어둠'의 내부가 있음을 전제한다. 궁극의 무, 영원한 어둠은 합리적 이성으로써 해명할 수 없기에 신비의 영역으로 남는다. 장켈레비치가 죽음이 삶의 '문제'이면서, '신비'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켈레비치는 어째서 경험할 수 없으며 결코 알 수 없는 죽음을 사유하려 하는 것일까. 죽음을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죽음은 무엇이다라는 앎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한계와 조건을 묻는 행위가 유의미해진다. "인간은 물음을 던지고 그 이유를 자문할 만한 지적 능력은 충분하지만 그 이유에 답할 만한 수단이 부족합니다."(45쪽) 요컨대, 죽음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행위가 그에게는 철학의 목적이 된다.
장켈레비치의 죽음 철학은 삶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로 나아가게 되는데, 평범한 인식이 향하기 쉬운 삶에 대한 안이한 긍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장켈레비치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에 대한 시적 인식으로 도약한다. 그는 "한 운명이 끝이 나고 닫히면 그 어둠 속에는 의미가 비어 있는 일종의 메시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35쪽). 장켈레비치의 죽음 철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는 수많은 죽음들의 의미 없음과 그 죽음에 대한 관심 없음에 저항하는 바로 그곳에 정확히 자리한다. "이 존재했음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고 소멸되어버린, 이름 없는 소녀의 환영과도 같다. 잠시나마 그 소녀가 머물렀던 세계는 그녀의 짧은 체류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세계와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영원히 다르다."(178쪽)
여기서 독자들은 죽음에 대한 그의 성찰이 인생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철학이자, '존재했음'의 진실과 조우하게 되는 시적 인식이자 감동적인 문학임을 깨닫는다. 한 존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로 인해 이 세계가 돌이킬 수 없고도 영원한 변화를 일으켰다는 이 문장 이상으로 삶의 유의미함과 존엄함을 표현할 말이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죽음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이보다 더 가슴 아프게 포착할 수 있을까.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 변진경 옮김 | 돌베개 | 210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