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25가지 개념을 다루는 방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은 무언가에 섞여 들어가며 스스로 바뀌어간 ‘불교의 초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연기, 무상, 인과, 무아, 보시, 중생, 분별, 중도, 공, 윤회, 자비, 마음, 식, 십이연기(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에 대한 이치와 지혜를 설명하면서 ‘21세기’라고 명명되는 이 시대의 연기적 조건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불교로,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의 방향을 조명한다.
그런데 왜 현대철학자가 ‘불교’를 이야기할까? 또 그에게 불교란 어떤 의미일까? 철학자 이진경에게 ‘불교’는 아주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종교였고, 아득한 먼 곳에서 가끔씩 보내는 철학적 눈짓에 불과했다. 그러다 우연히 성철 스님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접한 후 '벽암록'의 심오함과 유머러스함, 고준함에 매혹되었고, 가까운 이들과의 갈등에서 시작된 당혹스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아상에 대해, 그 아상이 만드는 세계의 일방성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었다. 내 기준에 따라 세상사를 분별하며 내 맘에 들지 않는 얘기는 싫다고 쳐내고 맘에 드는 얘기만 기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점차 '무아'를 설하는 철학(4장 참고)에 빨려 들어갔고, 세상을 향해 분별하고 재단하던 시선을 비로소 내 자신을 보는 데 내 자신이 만든 세상의 협소함을 보는 데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전에 읽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것, 가령 ‘차이의 철학’이니 ‘공동체’니 하는 것들이 ‘무아’의 철학 없이는 공허한 것이 될 것임을 직감했고, 그 직관 속에서 그것들 또한 변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운명의 지침들이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책 속으로
‘연기적 사유’는 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무상함의 저편을 찾는 게 아니라, 무상함을 보는 것이 지혜임을 설하고,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음을 가르친다. 심지어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가변적 세계의 저편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무상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으라고 말한다. 아주 달라 보이는 것에서도 ‘동일한 것’을 찾는 ‘동일성의 사유’와 반대로, 아주 비슷한 것에서도 ‘차이’를 보는 ‘차이의 사유’라고 할 것이다. _p.18
불교의 가르침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무상이 바로 본체고, 그것 이외의 본체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도를 깨친다는 것은 바로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아는 것뿐 아니라, 무상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무상함 속에서 대하는 것이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아니, 상(常)이란 무엇인가? 항상 그대로인 것,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조건이 달라져도 그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상을, 불변의 실체를 추구한다 함은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걸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이란, 그런 동일성이 없음이고, 그런 동일성에 반하는 것만이 있음을 뜻한다. 동일성에 반하는 것은 ‘차이’다.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항상된 것을 찾음이 달라 보이는 것마저 ‘동일화’하려 함이라면,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차이화’하고 있음을 봄이다. 동일성이 없다 함은 오직 차이만이, ‘차이화하는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상의 통찰은 곧바로 ‘차이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_p.43-44
중도는 유무를 떠나는 것뿐 아니라, 진위를 떠나고, 선악을 떠나고, 남과 여, 적과 친구 같은 모든 이항대립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서나 이항적인 양극단을 떠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중도는 어떤 문제나 사태에 적용되고 관철되어야 할 ‘사유의 방법’에 가깝다. 즉 사태나 문장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하여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서구의 논리학적 사유방법과 반대로 양극단이 서로 섞이거나 중첩되기도 하고, 하나가 반대의 것으로 전변되는 아주 다른 종류의 ‘논리학’이다.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극단을 넘나들며 해체하는 횡단의 사고다. _p.165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걸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 무명 속에 사는 중생이기 때문이다. 내게 불교를 알게 해준 스님의 대답은 “깨달은 사람처럼 살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깨달은 사람처럼 산다면, 깨달은 사람으로 산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보살행’이란 그렇게 깨달은 사람처럼 사는 삶을 지칭하는 말이다. “네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고 요약될 수 있는 자비행은 이런 보살행의 일부이다. 물론 ‘자리이타’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는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와 비의 행을 행해야 한다. _p.222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남’을 뜻한다. 어떤 것도 그것을 조건 짓는 것에 따라 존재하며, 그 조건이 사라지면 그 또한 사라진다. 이는 '중아함경'에서 말하듯, 석가모니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가 세간에 나오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주(법계) 안에 항상 있는’ 것이고, 부처란 이를 깨달아 중생에게 설하여 알려주는 이다. 조건에 따라 그 존재나 본성이 달라진다는 이런 가르침은, 지금은 철학이나 과학에서 약간은 다른 어법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지적되고 강조되는 바다. _p.283
무명이란 빛(明)이라고 표현된 지혜가 없음을, 다시 말해 연기법이나 무아의 진리를 알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의 상태이다. 행이란 행위나 그것을 하게 하는 의지나 충동을 뜻하는데, 무지로 인한 행동이나 충동을 뜻한다고 본다. 식은 인식작용이나 인식주체라고 하고 분별작용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 분별이 대개 그렇듯 ‘지혜’와 반대되는 의미를 함축한다. 무지에 따른 충동을 조건으로 하는 분별작용이니 그럴 것이다. 명색은 물질(色)과 정신(名)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고, 신체와 영혼 혹은 신체적 작용과 정신적 작용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육처는 눈, 코, 귀, 혀, 몸 및 의식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나 감각작용을, 촉은 그런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을, 수는 그 접촉에 따라 감각된 내용이나 그런 감각작용을 뜻한다. 애는 말 그대로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따른 애증의 작용을 뜻하고, 취는 맹목적 애증에 따른 집착이며, 유는 그런 애증에 따라 만들어지는 ‘존재’를, 생은 그런 존재의 발생을, 노사는 그 존재의 쇠락과 죽음 그리고 그에 따른 괴로움을 뜻한다. _p.284-28
이진경 지음 | 휴 | 356쪽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