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최원식(67) 이사장은 전국 각지의 광장을 밝힌 촛불들이 "개인에 기초한 '광장의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광장에 모여 최순실 등 비선 조직의 끔찍한 국정 농단을 부른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수십 만 시민들의 외침에서 "일류 국민에 걸맞은 '정치의 귀환'을 고대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최 이사장은 8일 CBS노컷뉴스에 "지난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운집한 20만 군중을 봤을 때 1987년 6월 항쟁이 떠오르면서도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고 전했다.
"저는 그날 부산작가회의가 주최하는 요산 김정한 선생 문학축전의 기조발제를 위해 부산에 내려갔어요. 부산도 (어지러운 시국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대단하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광화문광장에 간 작가회의 사무처장 등에게 '어땠냐'고 물으니 '감동 그 자체였다'고 하더군요. '시위 군중이 굉장히 절제하더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요새 시위에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이 달라진 점인데, 6월 항쟁과 같은 감동을 주면서도 보통 시위와는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는 "촛불시위를 통해 '시위의 시위다움이 성취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촛불시위를 시위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잖아요. 원래 촛불시위는 과거 동독 라이프치히 교회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졌죠. 촛불을 켜는 것은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커다란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위력을 과시하는 시위와는 또 다른 경건함, 축제의 성격을 지닌 거죠. 그런 점에서 촛불시위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우리말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최 이사장은 "박근혜 정권이 붕괴하고 있는 것은 '자작지얼'(自作之孼·자기가 저지른 일로 말미암아 생긴 재앙)"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계기로 진정한 정치가 귀환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그동안 정치라 불린 것은 사실 정치라 할 수 없습니다. '정치공학' 내지는 '정쟁'이었으니까요. 정치공학은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우리가 요새 정치와 '치안'(治安·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보전)을 구분해 사용하잖아요. 정치가 거의 치안 수준으로 전락한 것인데, 여전히 정치가 귀환했다고 보지 않는 이유죠. 지난 4·13총선 때 어느 정치평론가가 '정치는 삼류인데 국민은 일류였다'고 평했어요. 이번 시위를 보더라도 국민은 정말 일류인 것 같아요. 그러한 일류 국민에 걸맞은 정치가 귀환하지 않았다는 데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치가 뚜벅뚜벅 귀환했으면 합니다."
◇ "말도 안 되는 '박근혜식 폭주' 허용한 사회 지도층 깊이 반성해야"
"야당에서 권력을 쥐겠다는 생각을 내려놔야 진짜 정치가 귀환합니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 국민적 염원을 어떻게 수용하고 조직해서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매진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귀환할 정치를 고대하고 있어요."
최태민에서 최순실로 대를 이어 박근혜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며 40여 년간 전횡을 일삼아 온, 종교의 외피를 뒤집어쓴 최 씨 일가에 대해서는 "사익만을 추구한 수구세력"으로 규정했다.
"저들(최 씨 일가)에게 종교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니까요. 종교는 인류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잖아요.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불교가 말하는 '극락' '열반', 유교가 말하는 '성인' '대동세상' 등은 모두 인류의 오랜 꿈입니다. 위대한 종교들이 꿈꾸는 이상향에는 인류의 오랜 꿈이 투영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최 씨 일족은 종교를 빙자해 사익을 추구한 꼴이 되니, 종교라는 말을 절대 쓰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흔히 최태민·최순실을 고려 말 승려 신돈(?∼1371)에 비유하는데, 신돈은 위대한 개혁가였어요. 신돈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에요. 물론 신돈이 다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녔던 개혁적 성격을 (최 씨 일족에) 갖다 붙이면 안 됩니다. 이들은 완전히 사익을 추구했어요. 보수도 아니고 '수구'입니다. 이런 집단에 종교니 신돈이니 하는 말을 붙이면 절대 안 되는 이유죠."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태'는 국가마저도 사익 추구를 위한 먹잇감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물질만능주의, 물신교적 성격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최 이사장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박근혜식 폭주'를 허용한 사회 지도층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가, 종교인, 언론인 등이 깨어 있었다면, 표현의 자유를 일상에서 진통 없이 행사했다면 이런 엉터리 정권을 허용하지는 않았겠죠. 이에 대한 여론 지도층의 자성이 필요합니다. 작가들 역시 표현의 자유에 대해 정말로 깊이 생각하고, 이를 절대 가치로 삼아서 행사해야 할 때입니다."
◇ "개인에 기초한 '광장의 시대'…'정치의 귀환' 앞당길 촛불시위는 중요한 실험"
"저는 박근혜 정권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을 지지합니다. 그것이 광장에 모인 촛불들의 뜻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박근혜 이후'에 이 '촛불의 뜻'과 '귀환한 정치'가 만나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데 있어요. 박근혜 퇴진 이후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합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해법을 진지하게 찾아나가야 합니다. 이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곧 정치의 귀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문인들의 역할을 '반구'라는 표현으로 집약했다.
"거꾸로 반(反)에 구할 구(求). 어떤 사태에 직면했을 때 거꾸로 자기를 다시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번 기회에 작가들 역시 이 나라에서 어떠한 문학으로, 어떠한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반구를 철저히 해야 해요. 이러한 시대에 문인들은 문학 안에서는 물론이요 일상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최 이사장은 특히 이번 촛불시위를 두고 "'개인에 기초한 광장의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실험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학에 있어서 1970, 80년대는 '광장의 문학'이었어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화가 정착되는 한편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붕괴로 나라 안팎에서 격변을 겪으면서 한국 문학은 썰물 빠져나가듯이 광장에서 일제히 흩어졌어요. 각자 자기의 집필실로, 독방으로 퇴각한 거죠. 그렇게 '밀실의 문학'이 시작됩니다. '밀실의 문학'은 '광장의 문학'이 품은 과잉으로 인해 나온 것이었죠. 그런데 지금 다시 찾아온 '광장의 시대'는 1970, 80년대의 그것과는 또 달라요. 여기에는 촛불의 등장이 있는데, 촛불이 지닌 기도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들 하잖아요. 광장에 모인 촛불들은 결국 나라를 위한, 국민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점에서 과거 '광장의 시대'는 개인이 부족한 사회였고, 1990년대 찾아온 '밀실의 시대'는 사회가 결여된 개인이었다면, 다시 찾아온 현재 '광장의 시대'는 개인에 기초한 광장"이라는 것이 최 이사장의 진단이다.
"요새는 '집단'이 아니라 '집합'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덩어리'인 집단과 달리, 집합은 샐러드처럼 각기 개성을 지녔으면서도 하나로 뭉칠 수 있어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전체주의의 맹점을 극복하는 거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도 하나라는 점에서 이번 촛불시위는 굉장히 중요한 실험이 될 겁니다. 그만큼 진정한 정치의 귀환 역시 앞당겨질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