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국(32, 광주FC)은 FC서울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2003년 전신 안양 LG에 입단한 뒤 2015년(프랑스, 군복무 시절 제외)까지 줄곧 서울의 검붉은 유니폼을 입었다. 13년이라는 긴 시간. 늘 "축구 인생의 마지막도 서울에서"라는 생각으로 뛰었다.
하지만 정조국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지난해 서울의 중심 공격수는 박주영과 아드리아노였다. 정조국은 11경기 1골 1도움에 그쳤다. 데뷔 후 가정 나쁜 성적표였다.
아들 태하는 "아빠는 왜 안 뛰어?"라고 물었다.
결국 정조국은 이적을 결심했다. 아들에게 축구선수 정조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정조국 본인도 너무나 뛰고 싶었다. 결단을 내렸다. 13년 동안 집이라고 생각했던 서울을 떠나 광주로 향했다.
"다시 돌아가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서울을 떠날 수 있을까였어요. 그런데 너무 뛰고 싶었고, 축구선수 정조국을 태하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아내에게도 아직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광주로 간다고 했을 때 아내는 멘붕이었어요. 서울을 떠난다는 것이 많이 아쉬웠겠죠. 게다가 내가 서울에서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지 아니까 더 그랬어요. 하지만 내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줘서 이 자리에 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정조국은 광주의 노란 유니폼을 입었다. 첫 경기였던 포항전부터 터졌다. 정조국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훈련 때는 못 느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서울 유니폼이 아닌 다른 유니폼을 입고 뛴 첫 경기였어요. 검붉은 유니폼을 입지 않고 경기장에 나갔다는 자체가 실감이 안 났어요. 가장 큰 사건이었죠. 첫 골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 같아요. 그 골로 너무 큰 자신감을 얻었어요. 1년 사이 많은 걸 잃었고,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이었어요. 첫 골이 있어서 마음 편하게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골이죠."
그라운드에 뛰는 자체로도 행복했다. 성적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남기일 감독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31경기 20골을 넣었다. 17골의 아드리아노를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다. 생애 첫 득점왕. 아들 태하는 아드리아노가 쫓아올 때마다 "아빠 뭐해, 힘내"라면서 자극을 줬다.
"득점왕이 되고 아들이 날뛰면서 좋아했어요. 득점왕보다는 트로피가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드리아노가 1골 차로 따라왔을 때 아들 기분도 안 좋았어요. '아빠 뭐하냐, 1골 차다, 힘내라' 이런 말들이 자극제가 됐어요. 아들에게 트로피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정조국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결과가 나왔고, 시선도 달라졌어요. 너무 좋은 선택이었죠. 축구선수는 그라운드 안에 있을 때 가장 빛나잖아요. 그 사실을 다시 뼈저리게 느낀 한 해였어요. 사실 시상식 전에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했어요.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11월까지는 즐겨야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훈련에 참가한 유망주에서 이제는 서른둘 베테랑이 됐다. 하지만 태극마크는 여전히 정조국의 꿈이다.
"태극마크는 누구에게나 꿈이고 목표입니다. 그 꿈을 저버리는 순간 그라운드에서 뛰는 의미가 없어요. 우선 내가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겠죠. 국가대표가 위기 아닌 위기인데 다들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