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은 우리 방송이 키운 괴물… 언론의 책임 커"

한국PD연합회, 국정농단 및 헌정유린 관련 긴급 기자회견

4일 낮 12시, 서울 마포구 상암MBC 사옥 앞에서 한국PD연합회 주최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한국PD연합회 제공)
"생각해 보면 최순실은 우리 방송이 키운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사태가 터졌을 때 언론이 철저하게 진상규명하고, 개성공단 철수의 정당성과 사드 배치에 대해 방송이 문제를 지적했더라면 오늘날 최순실과 같은 암적 괴물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자괴감이 든다. 방송은 더 이상 주저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_ KBS PD협회 류지열 협회장

대통령의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유린 사태에 언론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연이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PD들이 모여 목소리를 냈다. 3000여 명의 PD들이 소속돼 있는 현업언론인단체인 한국PD연합회(회장 오기현)가 4일 낮 12시, 서울 마포구 상암MBC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들의 눈과 귀와 입이 되어 양심과 용기를 갖고 말해야 한다"고 밝혔다.

MBC PD협회 송일준 협회장은 "대통령이 스스로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비선실세가 국정을 농단하고, 이런 동안에 대한민국은 내치외교 할 것 없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대한민국의 지도자인 대통령이지만 수많은 정치인들 관료들 기업인들, 또 법조계 검찰 등등 이른바 대한민국의 지도층에 속하는 책임 또한 무겁다. 동시에 언론의 책임이 굉장히 크다"고 말했다.

이어 "여기 있는 PD들을 포함해 대한민국 언론이, 특히 공영방송이 살아있었다면 오늘날 같은 이런 사태는 미리 예방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MBC 경영진에 호소한다. 제자리에 있지 못한 PD, 기자들을 원직복귀시켜서 작금의 대한민국 실상을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의 간첩 조작을 다룬 다큐멘터리 '자백'의 감독이자, 지난 2012년 170일 파업 당시 MBC에서 해고된 최승호 PD는 "MBC에서 과거처럼 이런 문제점을 다룰 수 있었다면 굳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 고생을 하겠나"라고 말문을 열었다.

최승호 PD는 "박근혜 대통령이 가진 마지막 총칼이 MBC(사장) 안광한, KBS(사장) 고대영이다. 이들을 그대로 두고는 공정한 정국 운용, 대선관리가 불가능하다. 공영방송을 갈아엎어야 한다"며 "안에 있는 동료들이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돌파해 나가자. 싸우자"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국제분쟁 사안을 취재하고 있는 김영미 독립PD는 "제가 처음 방송할 때 배웠던 원칙이 '먼저 국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나가야 한다'는 것"이라며 "PD들이 국민들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박근혜 퇴진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송도, 정권도 타이밍이다. 이 타이밍에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뀐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현장에 PD들이 앞장설 수 있도록 공영방송 경영진도 그걸 기억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다음은 한국PD연합회가 발표한 성명 전문
참담하다. 수치스럽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이것이 나라인가. 봉건시대에도 일어날 수 없는 해괴한 일들이 대통령 집권 4년 내내, 국정 전 분야에서 벌어졌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대한민국은 처절하게 침몰하고 있다. 통치의 기틀은 무너졌고, 나라의 명예는 추락했고, 시민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그 끝이 어디인지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지금 이 나라는 1987년 6월 항쟁 전야를 방불케 한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으며, 대학가를 비롯한 각계의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스스로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이 참극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할 그가 변명과 미봉에 급급하고 있으니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국정을 농단한 비선실세, 이에 기생하여 사익을 챙긴 사람들, 이를 알면서 묵과하고 조장한 권력핵심, 모두 나빴다. 하지만 우리는 언론이 이 모든 이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공영방송은 권력의 앵무새가 되어 진실을 외면했고, 결과적으로 국정농단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도록 방조해 왔다. 어느 PD의 한탄처럼, 시민의 편에 설 수 있고, 서야만 하는 단 하나의 ‘권력’이기에 공영방송은 가장 나빴다.

특정 방송사의 취재진이 분노한 시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취재 현장에서 쫓겨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참담한 상황을 자초한 것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우리 자신이 아니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다. 지난 4년 동안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 왔는가? 권력 탓, 회사 탓을 하며 무기력하게 안주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묻고, 의심하고, 발언하며 제 할 바를 했다면 작금의 사태가 일어났을까? 한 조각이라도 진실을 전하기 위해 제작현장에서 땀흘린 PD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태의 엄중함에 비추어 볼 때, 우리 PD들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기 전부터 우리 사회는 이미 참담한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고 백남기 선생을 부검하겠다는 공권력의 천인공노할 패륜을 우리는 목도했다. 합리적 경쟁을 조롱하는 이화여대 사태는 정직하게 노력하는 시민들의 의욕을 꺾어놓았다. ‘통일 대박’이란 천박한 구호를 무색케 한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도입결정 등 일련의 사태는 이 나라에 전운이 감돌게 만들었다. 이 흐름의 뒤에 방송사 사장과 중간간부 인사까지 배선실세가 개입했음이 밝혀져서 우리를 경악케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여건이 힘들었다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는데 소홀했던 우리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론자유’를 들먹이며 국정감사 출석을 회피하고 답변을 거부한 자들 때문이라고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생존 경쟁을 이유로 권력 비판을 회피하는 경영진 때문에 공정방송이 어려웠다고 얼버무리지도 말자. 인사권을 틀어 쥔 청와대에 충성하는 자들의 전횡 때문이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우리 3000 PD들의 치열한 실천이다.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대한민국이다. 최순실에 대한 검찰 수사와 발맞춰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의제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비난 여론의 소나기를 일단 피한 뒤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어둠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바로 지금, 그들이 진실을 가리려 할 때에도 우리 PD들만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 3000 PD들은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들의 눈과 귀와 입이 되어 양심과 용기를 갖고 말해야 한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대통령 연설문 첨삭, 딸 이화여대 학사부정 등 이미 드러나 있는 의혹들 뿐 아니라 시청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의혹이 너무 많아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대통령 잠적과 최순실 연루설 △통일대박론, 개성공단 폐쇄, 탈북 권유 등 대북정책 농단 의혹 △위안부 합의 등 외교 개입 및 농단 의혹 △사드 배치, 차세대 전투기 등 대규모 국방사업 개입 의혹 △평창 동계올림픽 준비 관련 비리 의혹 △최순득, 장시호, 정유라 등 일가 비리의 실상 △최순실 국정농단을 알면서 옹호·방조한 당·정·청과 법조계 인물들 △재벌, 고위공직자 친인척과 최순실 연루 ‘8선녀’설 △박근혜·최태민·최순실 과거 자료 화면 발굴 보도 △집회 시위, 시국 선언 등 국민적 분노 충실한 전달 등 우리가 진실을 밝혀 주기를 기다리는 아이템이 줄을 서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모든 방송사 경영진에게 당부한다. 시청자들의 정당한 알 권리를 위해 진실을 추구하는 PD들의 노력을 존중하라. 상식과 양심에 따른 PD들의 취재 행위를 방해하거나 겁박하지 말라. 특히, 올바른 방송을 요구하는 구성원들의 정당한 피켓 시위를 물리력으로 탄압한 MBC 경영진에게 경고한다. 그러한 행태는 이 정권과 명운을 함께 하겠다는 의사표시와 다를 바 없으며,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 나아가 이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시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초심을 떠올린다. PD연합회 창립취지문 대로, 방송은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와 있다.” 막대한 영향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대중매체의 핵심 구성원인 우리 PD들은 “정치 · 경제 · 문화의 전부문에 걸쳐 국민의 시대적 요구를 수렴함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를 성취해야 할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천뿐이다.

2016년 11월 4일
한국PD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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