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루터가 로마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 등의 부당성에 대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써 붙이면서 시작됐다.
그 효과는 루터 자신의 예상을 뛰어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되는 대운동으로 발전하면서 각 나라마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졌기에 교회마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고 개혁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당시의 군주들은 십일조, 임직세 등 다양한 세금과 소작료 등을 로마교황청에 납부해야 했는데 독일의 경우는 그것이 국민 총수입의 40%나 돼 국내 재산의 유출을 막기위해서라도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함으로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인들로부터 특별한 민족적 지지를 얻었다.
루터는 중세의 참회제도와 수도원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를 훈련했지만 그 고행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인간적 노력을 더 하면 더 할수록 더 깊은 절망을 느꼈다. 그러다가 루터는 성경을 읽으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에 붙잡히게 됐다.
이것이 바로 “오직 믿음으로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이자 종교개혁의 혼이였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속죄와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①오직 믿음으로(Sola Fide) ②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③오직 은혜로(Sola Gratia) 라는 슬로건을 종교개혁의 3대 원리로 삼았다.
Sola의 의미는 모든 인간의 권위를 거부하는 신본주의 정신이다. 노회도 총회도, 교회나 목사나 장로나 그 어느 것도 이 Sola에 버금할 수 있는 지위나 권위는 없다.
모든 것이 성경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아래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로마 가톨릭 교회 편에서 볼 때 대단한 도전이요 반항이었기 때문에 개신교를 흔히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반항자)라 부르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교회의 의식 개혁에서부터 시작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교회 예배 의식(儀式)이 크게 달라졌다. 성직자 중심의 예배로부터 예배자 모두가 참여하는 예배로, 의전중심의 예배로부터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변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성직자 외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진행됐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회중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 성경은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성만찬에서 일반 신도들은 떡만 받고 포도주 잔은 받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실수로 흘려서는 안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제들의 특권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모든 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예배는 모든 독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로 진행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막혔던 예배자들의 입과 귀가 열리게 됐다.
성만찬에서 모든 예배자는 떡과 잔을 받게 됐다. 루터는 또한 예배를 위한 찬송가를 직접 작사.작곡해서 모든 예배자가 한목소리로 찬양함으로 예배는 활기가 넘쳤고 교회에 신선한 새 바람이 불게 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예배의 중심에 놓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 선포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까지 틀에 짜인 정형화된 의전 중심의 예배로부터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뀌게 됐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강조했던 루터는 그 자신이 위대한 설교가였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또 하나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시기에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시작됐다.
1521년 독일 황제 <카를(Charles) 5세>는 루터가 <보름스 청문회>에서 자신의 신앙적 주장을 굽히지 않자 루터를 추방하고 범죄자로 정죄하는 <보름스 칙령>을 선포했고 이에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한 루터는 작센(Sachsen)주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의 도움으로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했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모세의 미디안 광야와 같은 시기였고 고난과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실은 루터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이었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기간이었다.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는 오로지 성경번역에만 집중했고 결국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였고 수난의 시간에 하나님은 루터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루터를 통해 신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이 루터에 의해서만 시작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그보다 100년 앞서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후스(Jan Huss)같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세기 중엽부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인쇄술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인쇄 혁명으로 루터의<95개조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 출판되어 15일 만에 독일 전역에서 읽혀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1517년부터 1520년까지 루터가 쓴 30종의 저술들이 30만권 이상 팔려나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시작부터 그 이전의 위클리프나 후스와는 다른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위클리프와 후스의 피가 아니었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루터가 종교개혁의 개척자라 한다면, 캘빈(Jean Calvin)은 그것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캘빈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자고 주장했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이를 기념하는 토론회 등 각종 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나 지속성도 없고 본질에 대한 접근이 없어 그야말로 일회성 마케팅 행사와 같아 마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찾아볼 수 없는’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종교개혁의 본연은 ‘오직 믿음과 성경과 은혜로’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의 자리를 회복케 함으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날 한국교회에 깊숙히 뿌리 내린 성장과 물질중심의 맘몬(Mammon)적 행태를 타파하고 예수님 대신 목사를 교회의 머리로 섬기는 우상 숭배의 우(愚)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종교개혁은 아직 미완성으로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으로 '이게 나라냐?'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으나 '은과 금은 가득있으나 예수가 없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루터가 부르짓던 종교개혁이고 사회개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