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대가 없이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신간 '그림자 노동의 역습'

바쁜 현대인의 삶을 더욱 분주하게 하는 '그림자 노동'의 실상을 파헤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 출간되었다. 저널리스트 크레이그 램버트는 오스트리아의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주창한 '그림자 노동' 개념에 착안해, 오늘날 현대인이 보수가 없지만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들 때문에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울러 일상 전반에 폭넓게 파고든 그림자 노동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 사회와 경제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기술이 발전해도 그림자 노동은 줄지 않고, 하루의 많은 시간이 월급 명세서에 찍히지 않는 일들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다. 왜 늘 시간이 부족한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스팸 메일을 지우느라 시간을 허비한 적이 있는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하면서 공인 인증서의 벽에 가로막힌 적이 있는가? 현대인은 정보 홍수에 둘러싸이는 것 이상으로 자신도 모르게 많은 '잡일'에 시달리고 있다. 스타벅스에서 다 마신 음료 잔을 치우는 일은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주유도, 가구 조립도, 최저가 검색까지, 너무 많은 역할을 직접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바쁘다.

일찍이 이반 일리치는 임금에 기초한 상품 경제하에서 보수 없이 행하는 비생산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 일렀다. 저자는 정보 혁명과 자동화가 진전되고 있는 현재도 그림자 노동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다고 단언한다. 사회가 변화하고 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의 틈새에서 많은 일이 교묘하게 개인과 소비자에게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멀티태스킹의 인질이 되어, 일에 대한 자율성을 누리는 대신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있다.

이 책은 사람들의 여유 시간이 ‘셀프서비스’라는 이름의 자잘하고 사소한 일들에 점령당하는 순간들을 기민하게 포착한다. 그림자 노동의 물결은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시장에서건 온라인 세계에서건 할 것 없이 거침없이 밀려들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ㆍ 미국의 일반적인 직장인은 출퇴근하는 데만 매일 52분, 즉 1년에 약 217시간을 길 위에서 소비한다.
ㆍ 업무 보조 직원을 줄인다고 해서 그들이 처리하던 일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남은 직원들에게 다시 분배될 뿐이다.
ㆍ 사용 설명서는 이제 상품과 함께 제공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고객이 웹사이트에서 직접 다운로드받아야 한다.
ㆍ 현대인이 관리해야 하는 디지털 정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일정 주기마다 바꿔야 하는 패스워드는 갈수록 길어지고, 복잡해지고, 이제는 특수 문자까지 넣어야 만들어진다.
ㆍ 소프트웨어도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때마다 달라진 사용법을 새로 학습하는 것은 덤이다.

그림자 노동이 증가하는 이면에는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려는 기업들의 노력이 있다. 인건비를 줄이는 전략으로 인원 감축, 자동화 외에 이전에는 고객에게 제공하던 서비스를(즉 직원이 하던 일을) 일정 부분 고객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객들은 식당에서는 샐러드 바에서 직접 음식을 담아 오고, 공항에서는 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단말기로 직접 탑승 수속을 밟고, 문의 사항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찾기 위해 홈페이지 자주 묻는 질문 목록을 스크롤한다. 호텔 로비에 체크인 기기가 새로 설치되었다면, 프런트에 있는 직원이 한 사람 줄어든 것일 수 있다. 이렇게 그림자 노동은 대체하기 쉽다고 여겨지는 초보적인 일자리, 저임금 미숙련 일자리가 사라지는 원인이 된다.

인터넷을 통한 지식의 대중화, 정보 생산과 공유의 용이함도 그림자 노동의 증가를 가속화하는 요인이다. 한때는 전문가들이 독점하던 지식을 이제는 누구나 검색하고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스스로 그림자 노동을 택한다. 때로 이것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도 하는데, 특히 의료나 법률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분야에서 그렇다. 잘못된 정보가 담긴 유튜브 영상이라도 조회 수와 추천 수가 높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 노동 때문에 할 일 목록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이해한다면 일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축할 수 있다. 즉 그림자 노동을 선택의 문제로 만들 수 있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은 우리의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는 그림자 노동을 수면 위로 꺼냄으로써, 우리가 가진 소중한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도록 돕는 통찰력 있는 책이다.


책 속으로

삶은 더 바빠졌다. 하루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24시간인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사실 시간이 줄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유 시간이 줄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번창한 시대에 살고 있고, 이 번영이 한가로운 시간을 안겨 줄 게 분명한데 말이다. 하지만 조수가 해안을 침식하듯 새로운 일들이 조용히 우리의 시간에 침투해 여가를 조금씩 빼앗아 가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자원하지도 않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느라 허우적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일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림자 노동이다. ―들어가며

통근은 비용이 아주 많이 들고 시간까지 잡아먹는 그림자 노동이다. 통근자는 집과 직장을 왔다 갔다 하기 위해 혼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동차를 사서 보험을 들고 기름을 넣고 관리까지 해 가며 직접 운전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2005년 ABC뉴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일반적인 통근자는 출근을 위해 25.7킬로미터를 이동한다. 51킬로미터의 왕복 거리는 하루에 17.6달러, 일주일에는 88달러, 1년에는 4400달러의 비용을 발생시킨다. 시간적으로는 매일 출퇴근하는 데 52분, 1년으로 치면 약 217시간이 걸린다. 다시 말하면 주당 40시간씩 5주 넘게 무급으로 이동한다는 얘기다. ―들어가며

1950년대에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편지를 타이핑하고 상품을 조사하고 식료품값을 계산하고 샐러드를 만들고 캔과 병을 버리고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태워다 주는 일을 주유소 점원과 비서, 판매원, 계산원, 웨이트리스, 환경 미화원, 은행 직원, 버스 기사들이 처리했다. 오늘날에는 바로 당신이 이 일들을 물려받았다. ―1장 ‘그림자 노동이 밀려온다’

보조 직원을 줄인다고 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맡겨질 뿐이다. 새로이 등장한 잡일은 임금 인상의 정당한 이유로 제시되지 못할 뿐 아니라 개인의 직무 기술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자 노동은 사람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채 직무에 포함될 뿐이다. ―3장 ‘일자리가 사라져도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날의 대형 매장에서는 고객이 매장 감독이 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직원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지 않고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비자는 상품의 특징과 한계, 필요조건, 경쟁 우위와 경쟁 열위, 보증 기간 등에 대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일부 소비자는 집에서 온라인 검색을 통해 이 일을 한다. ―4장 ‘고객이 일하는 시대’

디지털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데이터를 발생시킨다. 기관들이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동안, 사람들 역시 자신의 컴퓨터에 기록을 쌓아 가고 있다. 파일, 북마크, 다운로드 받은 음악, 비디오 트랙, 사진 앨범, 이메일 메시지, 애플리케이션과 온갖 종류의 저장된 데이터는 그것들을 관리하고 지키고 업데이트하고 백업까지 하라고 요구한다. 좋든 싫든, 사람들은 모두 그림자 노동을 하고 있다. ―5장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욱 바빠지는 삶’

그림자 노동은 아주 매력적인 방식으로 기업과 조직에 보상을 안겨 주고 있다. 돈도 받지 않고 일해 주는 고객에게 일을 넘겨줌으로써 그 많은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자본가는 없을 것이다. 그림자 노동이 사람들의 일과에 통합되면서 사회적 관습과 경제적 패턴, 생활 방식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6장 ‘여가의 미래’

자동 기계 장치가 이러한 인간의 조직을 해체시키고 있다. 키오스크는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얻는 정신적인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감각 정보나 감정까지 사라지게 하면서 정보만을 처리한다. 키오스크는 대중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공공장소에 설치된 터치스크린 방식의 정보전달 시스템인 무인단말기를 말한다. 키오스크 사용자들은 스스로 자동 기계 장치가 되기 쉽다. 이지적이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디지털 정보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 방식은 점점 더 용인될 수 있으며, 기계뿐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의 훌륭한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자동 기계 장치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전염을 야기하는 행동 패턴을 주입시켜서 생물학적 자동 인형들로 이루어진 국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 사람들은 수십 년에 걸쳐 자동 기계 장치 제조 기술을 완성해 오고 있다. 그 기계들이 이제는 형세를 역전시켜 사람을 원료로 사용하는 생산 업무를 장악할 수도 있다. ―6장 ‘여가의 미래’

크레이그 램버트 지음 |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336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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