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를 맡아 진행해 왔던 한 중앙부처 공무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생각하고 밤새워 가며 고민하고, 휴일에도 출근해 하나하나 진행상황을 챙겼던 그가 자신이 한 일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공직기강 운운하며 입단속에 나선 탓에 내놓고 말하는 이는 드물지만, 관가가 밀집한 세종청사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 공무원들, "국가 아닌 비선 위해 일했나"...허탈
진상을 파악해 올린 보고서가 비선 실세 최순실 모녀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국장과 과장이 하루 아침에 '나쁜 사람'으로 몰려 쫓겨났다. 모 경제부처 공무원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공무원의 신분조차 하찮게 여긴 그들이야말로 참 나쁜 사람들 아니냐"고 되물었다.
더욱이 박근혜 정부가 핵심과제로 추진해 온 문화융성 프로젝트부터 개성공단 폐쇄라는 민감한 정책사안까지 최순실과 비선 라인이 손을 댔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공직사회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2007년 4월,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혁신관리비서관실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하나의 정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대략 35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각종 정치적인 과정에 의해 사회적 이슈가 의제로 설정되고 이것이 정부의 정책으로 구체화 되는데 14.5개월이 걸리고, 이를 정부 입법으로 채택하는데 7.3개월, 다시 정부안이 국회에서 법률로 통과되기까지 7개월이 걸렸다.
사회부처의 한 공무원은 "인사나 정책 사안이 청와대에만 들어가면 비정상적으로 늦게 결정이 내려지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라며 "그 이유가 이렇게 드러나고 보니 허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 공무원도 못 믿는 정책, 인사..누가 믿겠나
공무원 스스로가 자신이 집행하는 정책에 믿음이 없으면, 그 정책은 제대로 집행될 수 없다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당장 다음달 3일에 발표될 예정인 부동산 대책이 제대로 약발을 받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우려가 나오고 있다. 최순실 씨가 국토교통부의 미공개 개발계획을 바탕으로 땅을 사고 팔아 이익을 남겼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대책이 얼마나 진정성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신뢰 문제는 정책 뿐 아니라 공무원 인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당성이 없는 비선이 정부 고위급 인사에 상당부분 개입해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청와대의 인사 검증 시스템도 신뢰를 잃었다.
실제로 최근 해양수산부의 경우 1급 실장 2명이 모두 명예퇴직을 신청하면서 후임 실장을 인선해야하는데, 후보자는 3배수로 올라가 있지만 청와대가 최순실 게이트로 파탄이 나면서 인사위원회조차 제대로 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에 안팎으로 신뢰의 위기가 찾아오면서 국가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들도 의욕을 잃고 힘이 빠졌다. 더욱이 내각 총사퇴 등이 논의되면서 뒤숭숭한 분위기다. 그렇지 않아도 활력을 잃어가는 나라에 최순실 게이트의 독소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