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시작은 소설 '은교'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박범신이었다. 한 네티즌이 SNS에 박범신의 수필집을 편집하다가 일어난 사건을 폭로한 것이 불씨가 됐다.
내용은 이렇다. 해당 네티즌은 박범신의 수필집을 편집하면서 박범신과 여성 팬 두 사람, 그리고 여성인 방송작가와 술자리를 가지게 됐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박범신이 방송작가의 신체를 만지면서 결혼 여부와 나이에 대해 물었다. 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계속 술을 따라달라고 요구하며 신체를 만졌고, 다분히 성적인 농담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 네티즌은 "박범신에게 질렸지만 권력관계 탓에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파장이 커지자 결국 박범신은 23일 자신의 SNS에 사과문을 게시했다.
그는 "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다. 인생·사람에 대한 지난 과오가 얼마나 많았을까, 아픈 회한이 날 사로잡고 있는 나날"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더 이상의 논란으로 또 다른 분이 상처받는 일 없길 바란다. 내 가족, 날 사랑해준 독자들께도 사과드린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시인 박진성을 둘러싼 성추행 주장은 이보다 앞선 19일 제기됐다. 그가 시를 배울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올린 뒤, 이에 응한 여학생들을 말로 성희롱하면서 신체접촉을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마찬가지로 SNS를 통해 "미성년자였던 나는 나보다 나이가 스무살 많은 시인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증언에 힘이 되기 위해 올린다. 성인도 되기 전인 19세 때 (박진성이) 불온하고 사적인 연락을 지속했다" 등의 증언을 쏟아냈다.
박진성은 22일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사과문을 올리고 진화에 나섰다.
그는 "저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께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 저의 부적절한 언행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면서 "올해 예정되어 있던 산문집과 내후년에 출간 계획으로 작업하고 있는 시집 모두를 철회하겠다. 제 모든 SNS 계정을 닫겠다"고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일민미술관 함영준 책임 큐레이터가 22일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다.
함 큐레이터에게 언어적, 신체적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는 SNS 제보들이 빗발쳤고, 함 큐레이터가 그간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던 미술계 인사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함 큐레이터는 총 두 차례의 사과문을 통해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미술계 내에서 제 지위와 권력을 엄밀히 인식하지 못하고, 특히 여성 작가를 만나는 일에 있어 부주의했음을 인정한다. 불쾌함이나 압박을 느끼셨을 작가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사과를 전했다.
이어 "신체 접촉이 이뤄진 부분에 대해 깊이 사죄하고 후회한다. 이 부분은 마땅히 단죄돼야 할 질 나쁜 행동이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학 시절, 신입생이었던 내가 만취하자 집에 데려가 속옷에 손을 넣었다'는 또 다른 주장에 대해서는 "술 먹고 구토를 한 신입생을 당시 교제하던 여자친구의 집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 입힌 것이 전부"라고 해명했다.
함 큐레이터는 자숙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모든 것을 책임지고 싶다. 우선 제가 가진 모든 직위를 정리하고 진행 중인 모든 프로젝트를 최대한 빨리 정리한 후 그만두겠다. 자숙하며 필요한 모든 조치를 통해 반성하겠다"고 밝혔다.
아직까지도 SNS에는 문화예술계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성희롱 및 성추행 증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익명의 피해자들이 억눌러 왔던 진실을 공론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켜 보면 교수, 유명인 등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있는 '갑'이 저항할 힘이 없는 '을'에게 행하는 권력형 성희롱·성추행 사건이 대다수다. 여기에는 인맥과 소개에 따라 거취가 결정되곤 하는 문화예술계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얽혀 있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권력이나 위계를 이용한 성추행이기 때문에 그 죄질이 더 나쁘다. 정말 창피한 상황이다"라면서 "사회를 이끌어야 할 지식인 그룹이 일반적인 도덕성이나 인권 감수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훨씬 더 폭력적으로 군림하려고 하고, 강자의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추행한다"고 비판했다.
오 사무국장은 현재 문화예술계에서 무엇보다 자성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놨다.
그는 "이 사태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자괴감도 더 클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문화예술계가 자성의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게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이것을 굉장히 중요한 신호로 보고, 누가 봐도 불안하지 않을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