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제안이 쏟아지는 비선실세 의혹에 대한 '국면전환용 카드'라는 점에는 야권 전체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지만, 야권 내 개헌론자들의 목소리가 작지 않아 개헌논의가 정국을 집어삼키는 상황을 막기 어려워서다. 또 제도상 개헌의 칼자루 역시 박 대통령이 쥘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야권 지도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 직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은 일단 한 목소리로 "최순실, 우병우 등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덮기 위해 대통령이 개헌론을 던졌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윤관석 수석대변인은 "최순실, 우병우 등 측근 비리를 덮으려는 정략적 개헌, 국면전환용 개헌 논의 제안이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국민의당 손금주 수석대변인 역시 "누가 봐도 최순실, 우병우 등 대통령 측근의 국정농단을 덮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정의당 추혜선 대변인도 "국가폭력에 희생된 농민의 시신과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마치 대통령이 던진 개헌 제안과 바통을 주고받는 모양새"라고 꼬집었다.
◇ 헌법상 '대통령 헌법개정안, 공고 후 60日 內 국회 의결' 조항 고민
이런 야권의 공통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불을 붙인 개헌논의를 마냥 외면하기에는 상황이 녹록치 않다. 청와대는 일단은 개헌의 공을 국회로 던졌지만, 국회가 개헌논의에 나서지 않을 경우 박 대통령이 개헌논의를 주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 김재원 정무수석은 시정연설 직후 브리핑에서 "국회에서 개헌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그곳에서 단일안이 만들어지고 제안되면 그것도 충분히 반영하겠지만 개헌 논의가 정치적 이해 등으로 지지부진하면 대통령이 개헌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회가 대통령의 개헌 논의 제안에 따르지 않을 경우 대통령 주도로 개헌정국을 끌고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국회가 헌법개정안을 제출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이 헌법개정안을 발의하면 개헌절차가 시작된다.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개정안이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의결을 해야 한다.
국회 재적의원의 3분의 2(200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헌법개정안 본회의 통과는 장담할 수 없더라도, 대통령의 헌법개정안 준비부터 본회의 상정까지는 박 대통령 의도대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카드를 꺼낸 의도와 무관하게 개헌 논의가 본격화돼야 한다는 주장이 야권 내 적지 않은 것도 야권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이 임기 중 개헌 의지를 밝힌 것에 대해 "만시지탄이지만 우리 당으로서는 평가를 한다. 우리 당의 다수 의원도 개헌을 찬성하고 있으므로 논의는 해야 한다"면서 "특위 구성 등 논의에 참가 하겠다"고 밝혔다.
정세균 국회의장도 "대통령께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해 개헌 논의의 물꼬를 터 준 것에 대해 평가한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도 "최순실의 문제는 그대로 처리하면 되고, 개헌은 개헌대로 별개의 사안으로 보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말한 상태다.
개헌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비선실세 의혹이 이어지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개헌논의가 본격화될 경우 그동안 야권이 화력을 집중해온 '최순실게이트'에 대한 관심이 분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렇게 될 경우 여권의 의도대로 개헌논의가 대통령 비선실세 의혹 국면전환용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유로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개헌에 대한 당 지도부의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 당 핵심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야권 내 개헌논의가 백가쟁명식으로 이뤄지며 확대될 경우 여권의 의도(국면전환용)대로 개헌논의가 악용될 가능성이 있어 당 지도부의 입장을 의원들에게 알려주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 '최순실게이트' 예산·법안 현미경 검증은 계속키로
야권은 개헌논의가 블랙홀처럼 '최순실게이트'를 집어삼킬 수 없도록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등 국정농단 의혹이 제기된 기관 및 사업에 대한 예산과 법안을 '현미경 검증'하며 여권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민주당 간사를 맡고 있는 김태년 의원은 "비선실세 및 국정농단 예산은 삭감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이 예산은 일자리 창출 등 국민을 위한 예산으로 재편성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국민의당 손금주 수석대변인도 "예산심의에서 현미경심사를 하되, 사안별로 정책의 취지와 대상, 실효성을 살펴서 필요성을 검토하고 관리 측면에서는 엄격하게 집행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박 대통령이 주문한 국회 내 개헌특별위원회 설치를 두고 새누리당과 민주당, 국민의당의 입장이 갈리는 등 여야의 기싸움이 본격화되는 모양새여서, 이후 최순실게이트는 상대적으로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야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