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는 이런 격언이 있지요. ‘달콤한 사람을 조심하라. 설탕은 영양분이 없다.’”(161쪽)
“흠, 우리 나라에는 식초보다 꿀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요.”(161쪽)
“하지만 왜 파리를 잡으려고 하죠, 네? 대답해 봐요, 식초 아가씨.”(162쪽)
'식초 아가씨'에 등장하는 케이트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카테리나와는 다른 의미에서 ‘껄끄러운 사람’이다. 입바른 소리와 직설적인 태도 때문에 타인들은 늘 케이트를 ‘현대의 말괄량이’로 여겨 왔고, 그녀 역시 그들과 섞이지 못한 채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트를 좋아하는 것은 어린이집 아이들뿐이다. 그런데 케이트의 인생에 홀연히 나타난 표트르는 똑 부러지고 원칙주의자인 그녀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지 않는 케이트를 향해 칭찬의 의미로 ‘식초 아가씨’라고 부른다. ('식초 아가씨'를 통틀어 표트르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케이트이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모국을 떠난 외국인’이라는 표트르의 인물 설정은 '식초 아가씨'의 플롯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 주며, ‘말로써’ 길들이고 길들여졌던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달리 가식 없는 직접적인 언어로 맞부딪치는 가운데 외로운 영혼이었던 케이트와 표트르는 두 사람이 얼마나 공통점이 많은지―얼마나 지적이고 심지 굳고 결단력이 있는지 알게 된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서로의 장점을 알아본 것이다. 결국 케이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택하는데, 이들의 사랑은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평등을 이끌어 낸다.
한편 ‘식초’처럼 '식초 아가씨'에는 인물과 사건을 드러내 주는 주요한 장치로 먹거리가 이용되었는데, 케이트가 표트르를 처음 만난 것은 닥터 버티스타가 도시락을 깜빡 잊어(잊은 척하여) 연구소로 가져다준 때이고, 표트르가 버티스타네를 방문했을 때 그는 ‘약이 입에 쓰지 않으면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선물로 90퍼센트 카카오 다크초콜릿을 가져오기도 한다. 닥터 버티스타는 가족의 매일 저녁 식사를 고기 곤죽이라는, 자신의 기준에서 보건대 필요한 영양분이 모두 공급되고 시간과 메뉴를 선택하는 수고를 덜 수 있는 죽으로 정해 놓았다. 채식주의자 선언을 한 버니는 포테이토칩이 채소라고 주장하는 등, 곳곳에서 먹거리와 인물 및 사건을 연결 지어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대의 말괄량이에 걸맞게 케이트를 길들이는 사람은 표트르가 아니라 케이트 자신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변화와 성장과 수용이 환영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다. 타일러는 셰익스피어적인 플롯을 절묘하게 살리면서도 다시 쓰기를 넘어, 아이러니가 가미된 미묘하고 부드러운 유머, 사물을 관찰하는 예리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 인간성에 대한 신선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그녀의 주제와 인물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자신만의 완벽한 세계―'식초 아가씨Vinegar Girl'(2016)를 창조해 냈다.
‘이것은 케이트와 표트르의 사랑 이야기이다. 똑똑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는 듯 보여도, 인간적인 여자와 남자가 만나 서로를 알아볼 때, 오해하던 가족들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소설이다. '식초 아가씨'를 통해 나는 앤 타일러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옮긴이의 말」에서)
책 속으로
요령, 자제력, 외교술. 요령과 외교술의 차이가 뭘까? 아마 ‘요령’은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인 반면 ‘외교술’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겠지. 그런데 ‘자제력’에 그게 포함되지 않나? ‘자제력’에 세 가지 다 포함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언어를 너무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다고 케이트는 생각했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어휘를 사용했다.
_ 44쪽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으면 실제로 몸이 아프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후 며칠간 케이트는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도 몇 차례 겪었지만 이번 일은 전혀 새로운 경험으로, 칼날로 가슴을 도려내는 기분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 하필 가슴일까? 심장은 뛰는 펌프들에 불과한 것을. 그런데도 가슴에 멍이 든 기분이었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동시에 부은 것 같았다. 이 말이 자기모순으로 들린다면 그러라지 뭐.
케이트는 매일 황량한, 철저히 혼자라는 감정에 빠져 걸어서 출근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동행이, 같이 웃고 속내를 털어놓고 옆구리를 찌를 사람과 함께 있는 듯했다. 벌써 서로 모르는 게 없는 여자애들. 친해져서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는 커플. 차 옆에 서서 한바탕 수다를 떨다가 출근하는 이웃 여자들. 그들은 괴팍한 남편, 못 말리는 10대 자녀, 라이벌 친구들에 대해 속닥대다가 말을 끊고 케이트에게 “굿모닝”이라고 인사하곤 했다―심지어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랬다. 케이트는 못 들은 체했다. 머리를 푹 숙이면 머리카락이 옆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_ 91~92쪽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다르게 보는 듯했다. 케이트는 지위를 얻었다.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그들은 그녀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케이트는 이전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었다. 이런 변화가 화나면서도 어이없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또 사기 치는 기분도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결혼이 그녀의 수습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약혼 발표를 한 이후 단 한 번도 원장실에 불려 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_ 199쪽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여기서 지낸 3년은 힘든 시간이었어요. 외로운 세월이었죠. 곤혹스럽고. 다들 미국에서 지내는 게 무슨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만 백 퍼센트 선물만은 아니에요. 미국인들은 딱 오해하기 좋게 말해요. 아주 친절해 보이고, 처음부터 이름을 부르죠. 그들은 아주 편하고 격의 없어 보여요. 그러다가 전화를 꺼 버리죠. 난 미국인들이 이해되지 않아요!”
그와 케이트는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표트르의 반짝이는 가는 금색 수염과 파란 눈에 박힌 작은 갈색 점들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표트르가 물었다.
“혹시 언어 때문일까요? 난 단어를 알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요. 내가 말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일 때 그 ‘당신’을 칭하는 특별한 단어가 없어요. 영어에는 오직 하나의 ‘당신’만 있고, 당신에게 말하든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든 똑같이 ‘당신’이라고 해야 해요. 내 친밀감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난 이 나라에서 집이 그립지만, 지금 내 모국에 있다 해도 집을 그리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돌아갈 집이 없으니까―친척도 없고, 지위도 없고, 내 친구들은 나 없이 3년이나 살았어요. 내게는 아무 곳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여기서 괜찮은 척해야 해요. 모든 게…… 어떻게 표현하죠? 끝내주게 좋은 척해야 된다고요.”
_ 269쪽
앤 타일러 지음 | 공경희 옮김 | 현대문학 | 324쪽 | 14,000원
자신감 없고 늘 위태로워 보이는 인상의 유디트, 의사 남편과 두 자녀를 둔 변호사로 말재간이 뛰어나 화요일의 여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이지적인 카롤리네, 약국 재벌과 결혼해 아낌없이 부를 누리는 귀부인 타입에 직선적인 성격으로 독설도 서슴지 않는 에스텔레, 전도유망한 의학도였지만 직업 대신 남편과 아이들을 선택해 주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에바, 모임의 막내이자 화끈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에 유명 디자인 회사의 디자이너지만 늘 형편이 쪼들리는 키키까지 이보다 더 다를 수는 없을 것처럼 개성이 강한 다섯 명의 여자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프랑스어를 함께 배우며 알게 된 후로 매달 첫 화요일 문화원 근처 레스토랑 ‘르 자르댕’에서 모임을 가지고 일 년에 한 번은 다 함께 여행을 즐기며 십오 년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르 자르댕의 주인은 이번 화요일도 십오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여자들을 기다리지만, 웬일인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시간 유디트는 암 환자로 임종을 앞둔 남편 아르네의 곁을 지키고 화요일의 여자들 역시 돌아가며 그들을 살피고 있다. 결국 아르네는 숨을 거두고, 이후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심한 무기력상태에 빠져 있던 유디트는 생전에 산티아고의 길 순례를 시작했던 아르네가 미처 다 쓰지 못한 순례 일기장을 발견하고서 자신이 대신 그 길을 끝까지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의 목적지인 루르드에 도착해 일기장의 빈 페이지를 채워야 비로소 평온을 되찾고 예전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친구들에게 전하고, 화요일의 여자들은 유디트의 순례길에 함께하기로 뜻을 모은다.
우여곡절 끝에 화요일의 여자들은 드디어 순례의 여정에 오르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았지만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뜻밖의 문제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갈림길에서 유디트와 카롤리네가 각각 아르네의 일기와 순례 안내서를 근거로 서로 반대 방향을 고집하고 나선 것. 미묘한 신경전 끝에 마지못해 뜻을 굽힌 카롤리네가 친구들과 함께 유디트를 따라가지만, 순례가 계속될수록 화요일의 여자들 모두가 깨닫게 된다. 아르네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 실제와는 다른 탓에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응답이 따른다는 건 순 헛소리고 자신들이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새로운 의문만 생길 뿐이라는 것을.
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덮어둘 수 있었던 온갖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그들은 익숙한 일상을 떠나온 길 위에서야 비로소 또렷해진 각자의 문제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에바는 순례중 휴대전화기에 매달려 남편과 네 아이의 끊임없는 에스오에스에 끈기 있게 대답해주면서도, 늘 자기가 우선이었던 친정 엄마에 대한 반발심으로 식구들을 “제 양말 한 짝 구분 못하도록” 길들인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훌륭한 디자인을 완성해내 회사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일행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스케치북과 디지털카메라를 놓지 못하는 키키는 헤어진 연하의 애인이 순례길까지 쫓아오면서 또다른 문제를 떠안는다. 카롤리네는 미심쩍은 일기 내용을 맹신하는 유디트와의 갈등으로 불편해진 마음을 위로받고 싶지만 예상과는 다른 남편의 반응 때문에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결혼생활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된다. 유디트는 또 그녀대로, 왜 혼자 아르네의 길을 걷지 않고 친구들을 데려왔을까 후회하면서 그들의 말없는 비난과 끝없는 수다, 가시 돋친 말 한마디 한마디에 괴로워한다. 순례의 행복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상황이 나보다 나쁘다는 걸 알게 되는 걸지 모른다고 자위하는 에스텔레에게도 문제는 있었으니, 바로 자꾸만 멈춰 서는 바퀴 달린 가방과 화끈거리는 손이었고, 화요일의 여자들을 “어둠 속에 헤매게 하는 그놈의 일기”, 유디트가 친구들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는 아르네의 일기였다.
소설의 처음, 아르네의 죽음 직후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일기의 비밀은 깜짝 놀랄 만한 반전으로 이어진다. 과연 일기가 감추고 있는 비밀은, 아르네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했던 진실은 무엇일까? 또 이 때문에 파국으로 치달은 화요일의 여자들은 이 모든 걸림돌을 극복하고 그들의 우정과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까? 루르드까지 50만 걸음, 이 길고 고된 순례길 끝에서 그들 각자는 무엇을 찾았을까?
책 속으로
유디트는 감동했다. 친구들의 얼굴 표정만 보아도 기운이 났다. 친구들의 조건 없는 애정에 가슴이 벅찼다. 만약 요즘 알게 된 사이였다면 이렇게 친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헤쳐온 십오 년 세월이 서로의 모든 차이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다. 유디트는 친구들의 끈끈한 애정을 이 순간처럼 강렬하게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다. _51쪽
살다보면 모든 것이 맞물려 하나의 크고 의미 있는 전체를 이루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순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섯 여자가 비행기에서 편히 자리를 잡는 사이 아르네의 시한폭탄은 이미 초읽기를 시작했다. 점화장치가 작동되었다. 사전경고에 해당하는 작은 징후들이 있었으나 다섯 여자 모두 그냥 지나쳤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싸구려 술로 건배했다.
“화요일의 여자들의 순례여행을 위하여!” _69~70쪽
카롤리네의 경우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응답이 아닌 새로운 의문과 함정이 나타났다. 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내도 한 사람의 본질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요 며칠 사이 깨달은 터였다. 아니면 순례길이라는 게 본래 그런 건가? 일상에서는 감춰져 있던 것들을 순례가 끌어내는 걸까? _214쪽
카롤리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친구들을 지켜보았다. 친구들이 얘기하고, 손짓하고, 옥신각신하고, 웃고, 먹고, 마시는 모습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달라지긴 했지만. 카롤리네는 혼자 조용히 미소지었다. 이 순간 그녀는 만족스러웠다. 자기 자신과 세상이.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내일이. _451쪽
모니카 페츠 지음 |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452쪽 |14,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