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까지 밀어닥친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

신간 '1790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제 4권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시리즈 제 4권 '1790: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제4권에서는 낭시에서 일어난 군사반란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으로 화합보다는 극복해야 할 불화가 훨씬 더 많은 해인 1790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낭시에서 일어난 군사반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 프랑스 국회 안에는 의원들이나 방청객들이 종종 무기를 소지한 채 드나들고 있었고 급기야 의원들끼리 결투를 벌이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프랑스 전역이 혼란으로 들끓는 와중에 민간인 클럽을 드나들며 병사들은 위원회를 만들어 단체행동을 하고 장교들이 운영하던 군자금을 스스로 관리하겠다고 나섰다가 결국 군사반란으로 문제를 확대했다. 이처럼 이 책은 왕의 군대와 국민의 군대 사이에 첨예하게 불거진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을 국내외적 요인과 여론의 양상, 국회의원들의 법 제정 활동 등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민주적인 군대는 있어도 군대 안에 민주주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군대라는 곳은 철저히 명령과 복종을 근간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공간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혁명 원년인 1789년보다 혁명이 좀더 뿌리를 깊게 내린 1790년에 혁명의 열기가 급기야 '왕의 군대'에까지 밀어닥쳤다.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4권은 낭시에서 일어난 군사반란을 집중적으로 다룬다(1791년의 상황을 자세히 다룰 제5~6권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제3권에서 살펴본 '전국연맹제'는 시작부터 잔치가 분명했다. 더욱이 프랑스 왕국이 생긴 뒤 그런 종류의 잔치는 처음이었으며 분명히 국민화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790년은 화합보다는 극복해야 할 불화가 훨씬 더 많은 해였고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낭시에서 일어난 군사반란이었다. 여전히 파리와 지방에서는 빵값과 생활필수품 공급문제 때문에 민중이 봉기하여 크고 작은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가톨릭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의 갈등은 결국 피를 불러왔으며, 국경지대에서는 외국 군대가 침략할까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게다가 왕당파는 국내외에서 계속 일을 꾸며 혁명의 성과를 지우려 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국회 안에는 의원들이나 방청객이 종종 무기를 소지한 채 드나들고 있었고 급기야 의원들끼리 결투를 벌이는 상황이 연출되고는 했다. 이처럼 프랑스 전역이 혼란으로 들끓는 와중에 민간인 클럽에 드나들며 혁명의 열기에 휩쓸린 병사들은 위원회를 만들어 단체행동을 하고 장교들이 운영하던 군자금을 스스로 관리하겠다고 나섰다가 결국 군사반란으로 문제를 확대했던 것이다. 이렇듯 제4권에서는 왕의 군대와 국민의 군대 사이에 첨예하게 불거진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을 국내외적 요인과 여론의 양상, 국회의원들의 법 제정 활동 등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거인은 우리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똑바로 서자!"

이 문장은 혁명기의 대표적 신문 '파리의 혁명'의 발행인이었던 프뤼돔이 신문 제호 밑에 쓴 문구로, 신분사회를 무너뜨리고 평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법질서를 확립해가던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789년에는 혁명의 흐름을 지지하는 신문과 반대하는 신문이 함께 나왔다. 온건한 신문은 대체로 혁명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진행되던 혁명을 반대하는 신문은 크게 두 방향으로 갈라졌다. 극좌파 신문은 아직 혁명다운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파는 벌써부터 혁명이 희생을 너무 많이 강요한다고 주장했다. 극좌파의 신문은 혁명이 지지부진하다고 하면서 조급해했고, 우파의 신문은 당시 보수적인 사람들(귀족이나 종교인처럼 구체제의 특권층이나 농민처럼 구체제의 희생자)처럼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나 새로운 정치적 조건과 법은 새로운 갈등을 낳게 마련이다. 더구나 오랜 세월 이어져온 특권을 폐지하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은 좌우를 떠나 거의 일상적 차원의 일이었다. 급격한 변화란 안정된 체제에 대한 폭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반혁명이 있었다."

비교적 단순한 사회정치적ㆍ경제적 갈등을 넘어 대부분 폭력과 피의 대가까지 수반하는 혁명의 과정은 그만큼 복잡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이 일치단결해서 혁명에 참여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과연 그것을 혁명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반혁명은 혁명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기존질서 속에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조그만 변화에도 반발하며 더욱이 혁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반혁명세력,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수구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초에 반혁명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혁명이라 했다. 그때부터 혁명이 아닌 것, 혁명에 저항하는 기존의 것을 반혁명이라 불렀다. 마치 새 체제가 생기면서 이미 존재하던 체제를 구체제라 부르듯이."
혁명이 단순한 사건이고, 반혁명은 단지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면 비교적 실체를 파악하고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 어디 정치적 문제뿐이랴. 또 혁명기의 모든 사건이 작용과 반작용의 연쇄라면 차라리 혁명의 흐름을 이해하기 쉬울 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훨씬 복잡했다. 파리에서 일어난 일로 자극을 받아 다른 지방에서 그것을 본받고 모방하여 일어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30~31쪽)

왕의 군대 VS 국민의 군대


우리가 흔히 ‘장점’이라는 뜻으로 쓰는 '메리트merite'라는 단어는 구체제 프랑스 군대의 장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어다. 이 말은 사람의 한 부분으로 ‘얻다’ 또는 상으로 ‘받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mererer의 명사형meritum에서 나온 말로서 ‘소득, 봉급’, ‘특정인에 대한 (좋거나 나쁜) 봉사’, ‘보상이나 벌을 받을 만한 행위, 행실’을 뜻했다. 로마제국 후기 라틴어에서 이 말은 ‘가치’라는 긍정적 의미를 얻었다. 1611년에 이 말에는 특정 작품이나 예술품의 뛰어난 특성을 모두 아우르는 ‘장점’이라는 뜻이 더해졌다. 18세기에는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주는 훈장ordre de merite(공로 훈장)의 이름에도 쓰였다. 구체제의 신분사회에서는 이 말을 개인보다는 핏줄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귀족으로 태어나면서 몸의 한 부분으로 가지게 되는 ‘자질’ 또는 ‘능력’인 동시에 왕에게 봉사하는 귀족의 본분에 대한 대가로 신분질서와 특히 군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게 해주는 ‘보상’이다. 그 시대 귀족은 ‘능력’을 대물림해주었다. 그리하여 1788년 귀족의 95퍼센트가 군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1789년에는 장교 1만 3,500명의 90퍼센트가 귀족이었다.
이러한 ‘왕의 군대’는 1789년 혁명이 일어나면서 ‘국민의 군대’인 국민방위군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했고, 혁명이 더욱 과격해지면서 국내 질서뿐 아니라 국제 질서가 변화하는 데도 보조를 맞춰야 했다. ‘왕의 군대’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었고 군대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혁명이 일어난 뒤 정규군 부대인 ‘왕의 군대’의 병사와 부사관들이 참모부의 명령을 듣지 않는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다. 이처럼 군대에도 혁명/반혁명의 구도가 형성되었고 그러한 구도를 이용해 반란을 선동하거나 군대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한마디로 군 내부도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던 것이다.

낭시 사태를 불러온 여론 전쟁

혁명이 일어나자 급격히 군대 내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대다수가 귀족 출신인 장교들은 혁명의 상징인 삼색 표식을 멸시했으며 종종 가장 치욕적인 벌인 ‘곤틀릿 형벌’(많게는 50명씩 양쪽에 줄지어 선 병사들이 몽둥이나 주먹 또는 멜빵으로 때리는 사이를 걸어가게 하는 벌)을 가하는 등 병사들을 푸대접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병사들은 이런 장교들에게 평소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츰 장교들과 병사들 간의 마찰이 잦아졌다. 급기야 군내 내에 애국자와 귀족주의자(혁명과 반혁명)의 구도가 형성된 가운데 병사들이 장교들의 부대 운영자금 횡령문제를 따지고 들면서 낭시 사태가 본격화되었다. 대대로 특권을 누려오던 장교들 입장에서는 병사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새로운 법 조항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이를 둘러싼 여론 전쟁이 낭시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주민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저명한 시민은 자신들이 겪을 손실을 전혀 계산하지 않았고 오직 국가의 행복만 생각하면서 국회가 제정한 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법은 사실상 오랫동안 억눌렸던 비참한 계급에게 유리했다. 이들은 그 법에 찬동했고, 그 법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대립했다. 낭시의 주둔군도 이런 분열과 무관할 수 없었고, 전국을 휩쓸던 혼란의 분위기에 말려들었다. 어쩌면 조기에 잘 봉합했을 수도 있는 사태를 제때,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한 시정부의 무능까지 더해져 낭시 사태는 최악의 참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책 속으로

국회는 헌법을 제정하는 일도 힘겨워했는데, 더욱이 프랑스 전역에서 계속 민중이 들고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지방 도시와 농촌에서는 대체로 빵값이나 생활필수품 때문에 들고일어났으며, 툴루즈나 님 같은 곳에서는 종교적인 문제도 소요사태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마르세유에서도 왕당파와 혁명 지지자가 충돌했고, 교황령 아비뇽은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 프랑스에 통일되고, 프랑스 헌법을 적용해 시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몽토방, 바 리무쟁Bas Limousin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한마디로 혁명이 진행되는 1790년은 화합보다는 극복해야 할 불화가 훨씬 더 많은 한 해였다.(42쪽)

혁명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당시 국제관계 속에서 모든 나라는 외교관, 군인, 민간인을 동원해 다른 나라의 정보를 캐냈다. 이번에는 숫자 편지를 보내서 정보를 알렸다. 이러한 편지를 해독하려면 쌍방이 미리 책 한 권을 정해놓아야 했다. 예를 들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몇 쪽 몇 째 줄의 몇 번째 낱말을 숫자로 찾아내서 문장을 만들어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7월에는 국경에서 첩자를 잡았는데 그는 열쇳말을 알아야 해독할 수 있는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사람, 도시, 요새를 특정한 부호나 별명으로 지칭하고, 기병대나 보병대의 위치와 숫자를 알려주는 암호 편지였다. 왕은 십자표, 파리 시장은 세모, 리케티 레네Riquetti l'a??(미라보 백작은 귀족 칭호를 쓰지 않는 법을 제정한 뒤 이렇게 불렸다. 레네는 형이라는 뜻이며 미라보 자작과 구별하는 말이다)는 V, 모리 신부는 Y로 표기했다. 잡힌 첩자 리올(일명 트루아르)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다. (60~61쪽)

마르세유의 왕당파는 끈질겼다. 그들은 새로운 헌법의 원칙을 적용해 탄생한 합법적인 시정부를 공공연히 부인하면서 오직 왕의 군대 지휘관만이 정통성을 지닌 지도자라고 선전했다. 리외토는 시정부를 새로 뽑기 이틀 전에 공공연히 도전했다. 그는 군대를 모아 선거 당일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불법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거기서 시정부에 반대하는 선동을 일삼았다. 마르세유의 모든 구는 화가 나서 이 범죄 집단을 고발하는 한편 예정대로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뽑았다. 마르세유 코뮌 의장으로 뽑힌 카브롤 드 몽 쿠송도 시민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하고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러한 합법적인 과정을 보면서 이를 가는 사람들은 오직 귀족주의자와 왕당파뿐이었다. 이 사건은 애국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마르세유뿐만 아니라 남부 여러 도시에서 혁명과 반혁명의 세력은 끊임없이 충돌했다. (84쪽)

병사들이 돈 문제 때문에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이 군사반란의 동기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낭시의 경우도 장교들의 공금횡령 같은 돈 문제가 끼어 있었다. 드누 장군은 병사들이 자신들의 지휘관을 임명하고 꽃수레에 태운 뒤 장교들을 길잡이와 호위로 세워 수레를 몰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또한 그래서 일부 장교들은 부대를 떠나려 하고 일부는 숨어버렸다고 했다. (173쪽)

소수인 진압군이 다수의 저항세력을 차근차근 물리친 것은 국회가 제정한 법을 집행한다는 정당한 명분문제와 함께 의사소통의 한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란군 대표들은 부이예 장군과 면담할 때 여러 가지 제복을 보고 병력을 처음에는 3만 명까지 추산했다가 나중에는 1만 5,000명으로 추산했다. 반란군은 실제로 소수인 진압군에게 정신적으로 졌다. 러시아 혁명에서 소수파가 다수파처럼 알려져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예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시내는 아비규환이었다. 어떤 기병 장교는 부상을 입은 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데, 그를 학대하던 사람은 오히려 그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해 죽여버렸다. 어떤 신부가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가는데 미친 듯한 병사가 그 앞을 가로막더니 소총 개머리판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숨을 끊어놓았다. 창문에서 총을 쏴서 기병을 땅에 떨어뜨린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기병의 몸을 뒤져 물건을 가져가기도 했다. 이것은 대체로 반란군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내용이다. (229~230쪽)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312쪽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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