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이 흐른 2016년 10월18일. 김준성은 다시 한 번 울었다.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2라운드 9순위.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SK 문경은 감독은 김준성의 이름을 불렀다.
단상에 오른 김준성은 흐르는 눈물을 참느라 마이크를 잡고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 "모두 안 될 거라고 했다. 그럴 때 엄마만 힘내라고 해주셨다. 재작년에 드래프트에서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항암 치료 후 누워계셨다"고 소감을 밝힌 뒤 목 멘 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김준성은 "항상 겸손하고 열심히 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말을 이었다.
◇카페 알바·장례식장 매니저…다시 농구 선수로
2년 전 드래프트에 떨어진 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 어린이 농구교실에서 주말 강사도 했다. 2015년 2월 장례식장에 직원으로 들어가면서 농구공을 놓았다. 김준성의 말대로 다른 길을 갔다.
하지만 가장 잘 하는 것, 가장 좋아하는 것은 농구였다. 일단 모교인 명지대 코치로 부임했다. 그리고 올해 3월 실업팀 놀레벤트 이글스의 선수 모집 공고를 보고 다시 선수의 꿈을 키웠다. 어려운 집안 사정이었지만, 아버지는 "성공을 해도, 실패를 해도 내 아들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힘을 실어줬다.
김준성은 "사실 위기 의식도 있었다. 내가 외동 아들인데 아버지가 편찮으시고, 어머니 혼자 직장을 다니시면서 계속 뒷바라지를 하셨다"면서 "이제 다 컸는데 이거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 농구였다"고 말했다.
체육관이 없어 연습경기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선수들도 자주 바뀌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86kg이었던 체중도 72kg까지 빠졌다. 전국체전에서는 연세대를 꺾었고, 상무와도 대등한 경기를 했다.
김준성은 "체육관도, 숙소도 없었다. 고등학교란 고등학교는 다 연습경기를 했던 것 같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너무 힘들었다. 버스도 없고, 테이핑도 넉넉하지 않았다"면서 "다들 열심히 했다. 그래서 전국체전에서 그런 결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드래프트에 지원했을 때 다들 "안 된다"라는 말만 했다. 하지만 김준성은 부모님을 떠올리며 다시 신발끈을 조여맸다.
김준성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간이 안 좋으셨다. 어머니 혼자 뒷바라지를 하셨다. 전기회사에서 검침을 하셨는데 경기 날이면 항상 오셨다. 어린 시절에는 어떻게 우리 엄마처럼 경기장에 잘 올 수 있을까 생각도 했다. 커서 보니까 사회 생활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그런 게 힘이 됐다. 포기하면 안 됐다"고 말했다.
사실 기대는 안했다. 그저 마지막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도전했다. 하지만 문경은 감독은 김준성의 장점을 봤다. 무엇보다 절실함이 문경은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경은 감독은 "2년 전 드래프트에서 재능은 있는데 슛이 안 좋다는 전력분석이 있었다. 실업 기록을 보니 전부 20점이 넘었다. 나도 슛을 좀 쏴본 사람인데 노력으로 2년 사이에 좋아질 수는 없다. 노력이 보였다"면서 "그 정도 노력이라면 절실함으로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또 팀 분위기에 모범이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김준성은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했다. 2년 전에는 슬퍼서, 이번에는 기뻐서 울었다. 과연 2년 후에는 웃는 김준성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