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연기력과 경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을 연기해 낸 이 모델 출신 배우는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다.
'아수라'에서 그는 우애와 성공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는, 어딘가 '어설픈' 악인 문선모 역을 연기했다.
다른 배우들보다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평범한 경찰이 어떻게 악인이 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 결과 거목들 같은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과정이 결과로 나타난 것일까. 실제로 그는 이번 촬영 현장에서도 남달리 예쁨받는 후배였다. 그랬기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인터뷰에서도 그의 실력은 십분 발휘됐다. 놀라운 친화력으로 취재진과 쉼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편한 분위기를 이끌어 냈다. 다음은 주지훈과의 일문일답.
▶ 정우성과의 관계가 유독 친밀하다고 소문이 났다. 어떻게 그렇게 만만치 않은 선배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었나?
- 술이다. 알콜에 나를 적시면 녹아들지 않을 수 없다. (웃음) 모여 있을 때 은근히 연기 얘기 같은 심각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다들 소소한 이야기 하지. 어디가 아프다든가, 쑤신다든가. (정)우성이 형이 진짜 후배들한테 젠틀하다. 그런데 영화 속 도경과 선모의 관계가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욕도 편하고 그런 관계로 굳어진 것 같다.
▶ 현장에서 선배들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 그들의 치열함. 정말 어마어마하다. 반성하게 되더라. 저렇게까지 물고 늘어지는구나.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토당토않게 했다가는…. 작업이 너무 즐거워서 이 배우들 그대로 다른 작품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쉽지 않기는 하겠지만.
▶ 본인이 맡은 문선모 캐릭터는 어떤 '악인'이라고 생각하나?
- 홍보상 '악인 열전'이지 악인이 되려 했으나 되지 못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사고는 쳤으니까 악인은 됐는데 더 큰 사이즈의 악인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 한도경과 문선모의 관계는 어떻게 표현됐다고 생각하나?
- 도경이라는 인물 자체가 선모를 자기 동생처럼 많이 챙긴다. 선모도 다른 애들보다 도경을 많이 의지한다. 선모가 박성배의 사람이 되면서 점점 도경과 부딪치게 되는 이유는 내 미션인데 빼앗겨서 화가 나는 거지. 형 입장에서는 또 챙겨준다고 하는데 짜증이 나는 거고. 짜증과 선망이 뒤섞였다고 생각한다. 악인들도 책임감이 있다. 미션을 주면 되게 열심히 하고, 실패하면 비통해서 스트레스가 폭발한다.
- 처음부터 좋았다. 기본적으로 사나이픽처스 대표님까지 재밌는 분들이다. 워낙 영화인들이 김성수 감독에 대한 존경심이 있더라. '비트'를 보면 정우성 선배가 나와서 청소년의 아픔과 고뇌를 표현한다. 그게 어떻게 보면 상황이 말이 안되는데 또 기가 막히게 리얼하니까 신기하다. '아수라'는 이미 좋은 분위기니까 저는 좋다고 들어갔다. 처음에 힘들었던 건 내가 너무 어릴 때 봤던 귀신 같은 선배 배우들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그 낯섦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그냥 소주를 마셨다.
▶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을 정도로 꽤 잔인한 장면이 많다. 이런 장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 나는 이 영화가 상당히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렌타인 데이에 개봉하길 바랐다. 사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고혹적인 레드로 점철돼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배우니까 그런 시각적 데미지에 익숙해서 영화적인 표현이 확실하게 가는 것이 좋더라.
▶ 무엇보다 모든 캐릭터들이 치열한 살육전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 그 엔딩을 3일 밤낮으로 찍었다. 3일 째 촬영하려고 다들 지친 상태에서 모여 앉았는데 뭔가 느낌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래서 다들 머리를 맞대고 온갖 아이디어를 내면서 그 다음 날부터 싹 다시 찍었다. 나는 분량이 없어서 쉬고 있었다. 가끔 놀러가서 라면 먹으면서 앉아 있고. 배우가 오면 별달리 신경쓰지 않고, 좋아하는 현장이라 촬영이 없어도 계속 갔다. 이 현장은 되게 방치한다. (웃음)
- 평소에는 훨씬 더 널브러져 있다. 지금은 인터뷰니까 비속어도 쓸 수 없고 자제 중이다. 제가 요즘 후배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법이 있다면 그냥 형들이 이야기할 때 가만히 있으면 된다. (웃음) 형들이 고마운 정성을 표할 때는 다 받아주고.
▶ 사실 드라마 '궁'으로 한 번에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한 후에는 전혀 다른 색깔의 캐릭터들로 변신을 시도했다. 특별히 그런 장르 작품들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
- 설득력이 부족한 캐릭터는 아무래도 하기가 힘든 것 같다. 요즘 관객 눈이 얼마나 고급인데. 물론 해야될 때가 있으니 모든 작품이 다 좋지는 않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예전에는 미칠 것 같아서 '궁'을 못 봤다. 그런데 요즘에는 '궁' 관련된 사진이나 영상을 흐뭇하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런 나를 보면서 스스로 놀랐다. 여유가 생겼다 싶더라.
▶ 또래에 비해 로맨스물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데뷔 때와 지금 주지훈은 많이 달라졌다.
- 그 때만 할 수 있는 걸 조금 더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시에는 무모함과 무식함이 있었다. 성숙해지니 이런 생각도 하는 거지. 이제야 그걸 안 것 같다. 사실 30대도 젊지만 20대는 그 젊음이 배로 더 있다. 그런데 실감이 안 난다. 5년만 지나도 내가 훨씬 더 어른같아 보일 거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