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믜리도 괴리도 업시」 중에서
성석제 신작소설집'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2013년부터 올해까지 성석제가 집필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것이다.
책의 표제작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동성애’를 다룬다.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살아가던 중년의 ‘나’ 앞에 옛 친구가 나타난다. 어린 시절 ‘만인의 똥개’ ‘신데렐라’로 취급받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치이던 ‘너’는 내게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엮이는 존재다. ‘나’는 그런 ‘너’가 거추장스럽지만 어쩐지 ‘너’와의 마지막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한다. ‘나’는 은연중에 ‘너’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나’에 대한 ‘너’의 관심과 애정이 싫지 않다.
어느 날, ‘나’는 금발의 동성 애인을 둔 정상급 재불 화가가 되어 돌아온 ‘너’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너’는 화려한 외양과 성공의 표상들로써만이 아니라, ‘나’에게 대놓고 ‘커밍아웃’을 해서 나를 휘청거리게 한다. 고요하고 안온하게 허물어져가던 내 삶에 홀연히 다시 등장해 ‘미친놈’처럼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며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반(異般)’의 삶을 한껏 즐기는 ‘너’. ‘너’와 그 동성애인을 향해 ‘나’는 입을 비죽거리고 비아냥거리다 은근한 질투마저 느끼지만, 그 순간 ‘믜리도 괴리도 업시’ 살아가는 나의 따귀를 후려갈기듯 ‘너’의 일갈이 나를 훅 파고든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블랙박스」에도 모래처럼 허물어져가는 일상을 견디다가 돌연 나와는 너무 다른 인물을 만나 전기를 맞는 인물이 있다. 언제부턴가 창작의 샘이 말라 도무지 소설을 완성할 수 없게 된 중견 작가인 내 앞에 동명이인인 ‘너’가 나타난다. 내 차에 블랙박스를 설치해준 카센터 직원이었던 ‘너’는 살갑게 다가와 호형호제하는 것은 물론 내가 앓아누운 사이 쓰다 만 소설을 마무리해주기까지 한다. 소설작법을 어디서 배운 적도 없고, 세상에 문명(文名)을 떨쳐보겠다는 거창한 목표도 없이 그저 몸으로 쭉쭉 소설을 써내려가는 동명이인의 ‘너’는 마치 ‘나’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다. 그날 이후 ‘나’는 ‘너’에게 본격적으로 소설 대필을 맡기게 되는데, 이 위험한 거래도 결국 파국을 맞는다.
난 작가라는 것들이 뭐 특별한 줄 알았지. 알고 보니까 별거 아니더구만. 그깟 소설 나부랭이 못 쓰겠네 안 써지네 하면서 살려달라고 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더니 단물 쪽 빨아먹고 나서는 싸늘하게 배신을 때리네. (…) 이것들 뽕쟁이하고 뭐가 달라. 저 혼자 골방에서 약 빨다가 약발 다 떨어지면 밖으로 벌벌 기어나와가지고는 울고 짜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야, 씨발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필명으로라도 소설 써가지고 니들 동네 전부 말아먹을 수 있어.
_「블랙박스」 중에서
앞으로 ‘우리’의 공동창작은 어떻게 될 것이며, 그 이전에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작가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의 자의식과 고뇌와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블랙박스」는 메타소설조차 이야기의 힘으로 돌파하는 작가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강렬한 소설이다.
「먼지의 시간」에서는 성석제표 해학과 웃음을 느낄 수 있다. 대자연 속의 명상가이자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임을 자처하는 M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된 ‘나’는 입만 열면 잘난 척 일색에 ‘구세활인염’이라는 만병통치약까지 파는 ‘정신적 스승’이 아니꼽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와 M은 핑퐁을 하듯 긴장감 넘치는 말씨름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묘한 애증의 감정마저 싹튼다. 이 소설은 멘토링과 명상, 자기계발의 신화를 추앙했다가 이내 손쉽게 짓밟는 세태 속에서 정작 ‘나’의 삶과 주변은 어떠한가를 날카로운 농담에 섞어 되묻는다.
성석제의 최근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매달리다」는 그가 전매특허의 웃음과 농담을 완전히 거두어내고 묵직한 서사로 밀어붙인 작품이다. ‘납북 어부 간첩 사건’으로 불리는 실제 사건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이 소설은 굵은 느티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집중해서 매달리고” “바다에 매달리고” “생각에 매달리고” “아버지의 강건한 맨몸에 매달리고” “생계에” “침묵에” “사는 데” 매달리는 인물들. 다시 말해 “매달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인물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비단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린 어느 불운한 남자의 사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뼈저리게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성석제 소설의 한 축을 차지하는 것은 ‘몰두’와 ‘중독’의 유전자이다. 성석제 소설의 인물들은 무언가에 미치거나 매달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골짜기의 백합」에서는 여동생 ‘선녀’를 위해 자신의 생을 털어 바치는 한 여인을, 「사냥꾼의 지도」는 여행지에서 길을 잘못 접어들며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를 탐험하면서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몰두」에서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규명하게 해줄” 단 한 권의 궁극의 책 ‘이피터미(Epitome)’를 찾아 떠나는 소년과 그 여정에서 만나는 ‘몰두자들’의 세계가 방대하게 펼쳐진다.
「나는 너다」는 어쩌면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빠져 있는 ‘중독’ 증상일지 모를 ‘스마트폰 중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284쪽 | 12,000원
표제작 「첫사랑」은 ‘지옥에서도 끝내 견디고 성장해야만 했던 소년들의 동성애’와 지독한 성장담이 오묘하게 엉켜 있다.
「첫사랑」의 주인공 ‘나’는 대도시 변두리의 ‘지옥구 지옥동의 지옥중학교’로 막 전학 온 시골 소년이다. 전학 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학교 최고의 깡패에게 죽도록 맞은 날, “어떤 식으로든 위안받고 싶어하던 내게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을 건네는 한 소년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의 친절을 뿌리치고, 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지긋지긋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픈 ‘나’의 주위를 행성처럼 따라다니는 ‘너’. 너는 어쩜 이리도 내게 다정하게 구는 걸까? 너는 내게 왜 이토록 주기만 할까? 이 소설은 지옥에서조차 성장해야만 했던 두 소년의 애틋한 한 시절을, “지옥의 빵공장에서 빵 트럭이 쏟아져나오고 딴 세상 바다에선 고래들이 펄쩍 떠오르는 그때”를 아름다운 문체와 삽화를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성석제의 데뷔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어느 건달 사내가 자동차 사고로 추락해 사망하기까지의 4.5초, 그 찰나의 시간을 붙들고 쪼개어 써낸 소설이다. 세상 무서울 게 없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자동차 사고로 물 속으로 추락하기 직전에야 비로소 외치는 “엄마, 무서워”라는 단말마의 비명은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매일 외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단 한마디일지 모른다.
「조동관 약전」은 성석제의 장기인 한 인간의 일대기 서사를 단편으로 만날 수 있는 소설이다. 시골 마을의 답 없는 깡패 조동관이 “은척 역사상 불세출의 깡패로 우뚝 서는” 과정을 담았다. 인간을 법과 시스템 안에 가두고 단정하고 얌전하게 길들이려 하는 모든 것들에 처절하게 반항하는 ‘조똥깐’의 “짧고 치열한 일생”은 호쾌한 웃음으로 시작했다가 우리 역사 속 비통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며 끝난다.
「경두」는 자신만의 멋진 오토바이를 갖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이다. ‘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한 경두는 단지 부모 없는 가난한 중국집 배달부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보호받지 못한다. 어른들은 경두를 짓밟고 지나가거나 혹은 경두가 가진, 가지게 될지도 모를 한줌의 희망마저 빼앗으려 한다. 경두가 꿈을 펼치고 활주할 수 있는 땅은 없다. “나는 어른들보다 오토바이를 더 믿어요”라며 배달용 오토바이 말고 자신만의 오토바이를 갖길 간절히 꿈꾸는 경두. 화자인 ‘나’는 그런 경두의 이름을 하염없이 부르며 경두의 삶에 일어나는 아비규환과 어른들의 패악을 낱낱이 묘사한다.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는 자식들을 부려먹고 놀래주는 일을 낙으로 삼는 한 가장과 그런 아버지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아들의 팽팽한 대결을 담은 소동극이다.
「새가 되었네」는 충격적일 정도의 절망과 비통함을 머금은 아버지의 서사다. 마치 곧 다가올 외환위기를 예언이라도 한 양, 믿는 사람 모두에게 배신을 당해 부도를 내고 가족에게도 버려진 한 중소기업 사장을 그려냈다. ‘새가 됐다’라는 말은 ‘부도를 내고 떴다’는 업계 용어다. 사업이 망해도 사람들을 배신하고 ‘새’가 되면 살아남는다.
“봤어? 오늘도 중소기업 사장이라는 작자 하나가 목을 맸던데. 초보나 하는 짓이지. 저야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겠지만 도대체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그래. 사업에 초보, 인생에도 초보인 것들.”
언젠가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가 초보였다.
_「새가 되었네」 중에서
이 밖에도 천박하고 몰상식하기 그지없는 한 주류업자와 한 병실을 쓰게 되며 그에게 대책 없이 당해야만 하는 소시민의 고통을 담은 「이인실」,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한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서간문 형식에 녹여내 당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유랑」에 이르기까지 성석제는 마치 정교한 변검술을 구사하듯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44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