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으로 오는 19일 국회 운영위원회 청와대 감사에서 최순실씨,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등에 대한 공세가 예고된 직전 이슈화됐다. 앞선 사안이 가려지면서 국면이 전환되는 이른바 ‘물타기’ 의도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장기적으론 내년 대선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당시 후보)도 친노 진영을 향해 “서해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하려 했다”는 공세를 폈었다. 종북(從北) 이슈로 ‘리턴매치’ 구도를 짰다는 의혹이 나오는 대목이다.
◇ 친박 ‘점화’ → 靑 “문제 심각”…4년 전과 같은 ‘기시감(Deja-vu)’
노무현 정부가 2007년 11월 북한인권결의안에 표결을 하기전 북한에 먼저 물어봤다는 문제제기는 지난 14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종합감사 과정에서 제기됐다.
친박계 ‘맏형’ 서청원 의원은 “국기를 흔든 큰 문제로 외통위원장은 여야 간 합의해 문서 열람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사실을 밝혀야 한다”며 “우리가 북한의 종속국가도 아닌데 유엔 결의안을 찬성하나, 못 하나를 북한에 알아봐서 결정하자는 건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앞장섰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그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의 등장인물, 특히 진술이 엇갈리는 김만복 국정원장 등을 국회 증인으로 부르겠다며 주장을 이어받았다.
그러자 청와대는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정현 대표는 대통령기 이북도민 체육대회 축사에서 ‘종북(從北)’ 혐의로 퇴출시킨 옛 통진당과 더민주를 연관시키며 “이런 사람들이 다시는 정부에서 일할 수 없도록 만들겠다”고 엄포를 놨다.
당청(黨靑)이 공조해 사안의 심각성을 증폭시킨 것으로 지난 대선 직전 박 대통령의 선거본부가 썼던 방식과 비슷하다.
2012년 10월 총괄선대본부장으로 투입됐던 김무성 전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NLL 포기’ 발언을 한 비공개 대화록이 있다고 폭로했었다. 박 대통령은 유세 현장에서 “NLL을 사수하겠다”며 이를 선거에 활용했다.
‘송민순 회고록’의 효과는 일단 청와대 측 인사들의 ‘비선실세’, ‘비리’ 등을 가리는 효과에 동원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오는 21일 예정됐던 운영위 국감이 회고록을 둘러싼 여야의 진실공방에 밀려 가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같은 결과는 당초 회고록이 작성된 목적과 괴리되는 ‘외부효과’라는 반응도 있다. 송 전 장관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당혹감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송 전 장관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 준비 조직에 속해 있다는 설(說)과 맞물려 회고록이 문 전 대표와의 향후 대선전(戰)을 위해 씌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여권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문 전 대표 측이 반 총장의 등판을 가정해 검증을 벼르고 있듯이 반 총장 측도 반격 내용을 준비했을 것"이라며 “친박계가 이를 미르 정국에 활용하자 송 전 장관이 당황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현재 반 총장 외곽 조직에는 전직 외교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고도 했다.
◇ ‘진영 논리’ 강화 전망, 文 ‘대권 자질’ 시험대 오를 듯
NLL 대화록 논란이 대선 국면에서 여야 각자의 지지 계층을 결집시켰듯이 회고록 역시 대결구도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여권은 벌써부터 북핵 위기 고조와 연계한 장기적 ‘대선 이슈’로 끌고 갈 심산을 드러내고 있다.
향후 대응 기조에 따라 문 전 대표의 대권 자질도 자연스레 검증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전에 북한에 물어보자'는 제의가 있었는지와 사전이든 사후든 북한 접촉과 관련한 결론을 본인이 내렸느냐는 핵심 쟁점에는 즉답하지 않고 있다.
다만 문 전 대표측은 "결의안을 기권하기로 결정한 마당에 북한에 다시 물어보고 결정하자고 하는건 상식적이지 않다"며 "회고록의 내용과 실제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NLL 대화록도 대선 직후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가, 야권이 여권과 국정원의 연루설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다시 불거져 ‘대선개입 의혹’을 가리는 데 방해가 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문 전 대표는 국가기록관 원본에 ‘NLL 포기’ 발언이 있으면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대응했지만, 자료가 보존돼 있지 않은 것으로 판명돼 ‘사초(史草) 폐기’ 논란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