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스키의 스타일은, 시인 본인의 말대로, “어떤 보호막도 겉치장도 없는 궁극의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허세와 수줍음, 염세와 동료애, 싸구려 감성과 세련미가 뒤섞여 있는 부코스키 시의 정수”를 그의 시선집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에서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생전 부코스키와 친분이 있던 어느 편집자는 그를 두고 ‘열정 가득한 미치광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마흔아홉 살에 전업작가가 되기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수십 년간의 무명 생활을 거친 시인은 몸소 세상에 부딪쳐 인생을 배운 셈이다. 그의 시가 “현대 도시인(특히 중하층민)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 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코스키는 책상물림들을 경멸했고, 이는 곧 그의 예술론과 직결된다. 이 책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곳곳에서 작가에 대한 부코스키의 유쾌하고 진진한 고백을 목격할 수 있다.
나이 따위, 혜성처럼 나타나는 천재들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맥주나 더 마신다/ 점점 더 많이.
그리고 경마장을 들락거린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딴다/ 가능하면. (...)
과도한 운동은 삼간다.
한낮까지 내처 잔다.
신용카드를 피하거나/ 뭐든 제때 지불하지/ 않는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7~9쪽)
“당신은 훌륭한 작가요.”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인간으로선/ 아주/ 개차반이야!”
―「유명한 시인을 만나다」(83쪽)
‘열정 가득한 미치광이’와 책상물림이 만났을 때 벌어진 해프닝을 위의 시 「유명한 시인을 만나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 들어 봐, 난 내가 죽을 때 누가 우는 거 별로야, 그냥/ 처분 절차나 밟아, 난 한세상 잘 살았어, 혹여/ 한가락 하는 인간이 있었다고 해도, 나한텐/ 못 당해, 난 예닐곱 명분의 인생을 살았거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아, 그러니 추도사는 하지 마, 제발,/ 정 하고 싶으면 그는 경마 도박을 했고/ 대단한 꾼이었다고만 해 줘.// 다음 차례 는 당신이야,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거든,/ 그럴 수도 있단 얘기야.
―「잊어버려」(109쪽)
미국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아니, 내가 이자를/ 착착 쌓아 올릴 수 있다니./ 이런 게 정부가 하는/ 일이긴 하지만/ 얼마 뒤엔 나를/ 혹은 내게 남은 것을/ 보러/ 찾아올 예정이었다./ 그날 경마장에서 잃은/ 50달러가 푼돈처럼 보였다.
―「캘리포니아, 프레즈노, 사서함 11946 (93776)」(37쪽)
찰스 부코스키 지음 |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152쪽 | 10,000원
이근화 시인의 네번째 시집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감정이 절제된 차분하고 담백한 어조로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섬세한 관찰력과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낸다. 욕망과 갈등이 들끓는 고단한 일상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부조리함과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냉철하게 응시하면서 “무감각하기만 한 일상의 시간”과 “나날의 삶이 기실 얼마나 메마르고 외롭고 위태로운 것인가를 알려주는 비명이자 침묵”(이영광, 추천사)의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남기며 잔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밤 한권의 책이 나를 낳았다/피부와 머리카락이 없고/입술과 성기가 없는 어여쁜 사람/오늘밤 내가 태어나고 나는/한권의 책을 네 옆구리에서 다시 찾아냈다/여러개의 서랍 속에서/모두들 태어나고 싶은데//그게 나를 부르는 소리라니/안아줄 팔도 없이/달려갈 발도 없이/네가 나를 부른다/아무 냄새가 없는 꿈속에서/나는 괴로워한다/나의 탄생을/한권의 책을//그건 내가 너를 만나는 동안 만들어낸/길쭉한 귀 동그란 코 벌어진 입술/애써 얼굴을 지우며/한권의 책을 가만히 내려놓았다/그게 너일까/한권의 책 속에서/정말 그렇게 살려고 내가 태어났다//네가 영원히 죽는다 해도/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전문)
이근화의 시는 한눈에 가늠하기가 어렵다.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을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도 그럴 것이다”(「택시는 의외로 빠르지 않다」)라는 짐짓 무심한 표정의 일상적 어법으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도달할 곳이 없는 세계”(「네덜란드인과 결혼하기」)와 사물에 대한 시인의 세심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그냥 그럴 것”(「집으로 가는 길」)인 예사로운 풍경들 속에서 ‘정신의 거처’로서의 시를 찾는다. “우스운 과거와 무시 못할 가족력”(「택시는 의외로 빠르지 않다」)이 있고 “적막과 허무”뿐인 “정적과 암흑의 놀이터”(「코맥스 200」)인 우리의 인생이 결국은 “불가능한 꽃/불가해한 꽃”(「산유화」)으로 피어나는 한편의 시라는 깨달음에 이르며 삶의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다.
나는 비자연/여기저기 공기를 섞어놓는다/손에 묻은 얼굴은 지워지지 않는다/물과 흰 빵을 뜯어 먹고/아랫배에 조금씩 나를 버린다/나는 비자연/깡통을 걷어찬다/고인 물이 사방에 퍼뜨린 욕설만큼이나/입김이 뜨겁다/나를 이곳에 내려놓고 가는 건/중대한 오류/원래 있었던 곳에서 내 발걸음이 닿는 곳까지/개그가 넘친다/당신들이 차례대로 쓰러져도/용서해주지 않겠다/나는 비자연/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빗줄기가 우산을 통과한다/엉망으로 튀어서/나는 다시 살아볼 생각이다(「나는 비자연」 전문)
시인에게 일상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눈빛이 떠”도는 미지의 세계이며, 시인은 “네가 나의 절벽이 되는 삶”과 “재가 너의 향기가 되는 죽음 위에”(「눈사람」) 절박한 마음으로 서 있다. 공감과 소통은 단절되고 곳곳에서 “지옥의 음악 소리”가 “부글부글 흘러나오는” 이 공포의 세계에서 더이상 “슬픔은 들리지 않”고 “고독은 냄새 맡을 수 없”(「가짜 논란」)으며 고통은 흔적도 없다. 하지만 시인은 “길 위에 더럽게 버려진” 채 “오늘도 살아야”(「요양원」) 한다. “길거리에 마구 내뱉어진” 그가 돌아갈 집이라고는 비록 “헛된 망상처럼 높고 반듯하고 분명”(「내 죄가 나를 먹네」)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지만, “침묵과 울분 속에서” 마치 “세상을 다 아는 눈빛”(「새의 가슴」)을 번뜩이면서 말이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그 사이로 낯선 손을 들이민 사람이 있었다/집은 거부를 모른다/나와 너와 우리가 그 집에 기대어//세상에서 가장 웃긴 일이 일어났지만/아무도 웃지 않았다/발소리가 푹푹 꺼지고/집은 사라질 줄 모르고//(…)//조금 떠 있고/늘 가라앉아 있는/헤매고 방황하는 집/발이 쉬지 못하는 집//너의 집은 어디니/누군가 진지하게 물었다/정확히 그것을 모르지만/나는 밤마다 발이 닳도록/그곳을 찾아가요//큰 입을 벌리고 나를 삼키고/나는 즐겁게 죽어간다(「집은 젖지 않았네」 부분)
침묵의 어둠속으로 기울어가는 세계에 대한 의심과 불안 속에서 시인은 맹목적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날마다 죽는 연습”(「코맥스 200」)을 하는 비참한 고통 속에서 “발을 씻듯 허무를 견디고/계단을 오르듯 죽음을 비웃”으며 살아가지만 시인은 “내 앞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 옆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대화」)이다. 시인은 어느날 “검은 비닐봉지가 아름답게만 보”이다가 문득 “구겨진 비닐봉지 앞에서/미안한 마음이 든다”(「유통기한」)고 고백한다. 시인은 이제 “더 많이 꿈꾸고 사랑하고 춤을 추”면서 “무너진 꿈”(「왜 당신이 가져갔습니까」)을 일으켜세우고, “내가 모른 척 방치한 것들”(「내 죄가 나를 먹네」)에 대한 처참한 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나’의 삶에서 ‘우리’-공동체의 삶의 영역으로 시야를 넓혀간다.
이근화 지음 | 창비 | 144쪽 | 8,000원
어느덧 여름 같은 봄날
하얀 나비 한 쌍 폴폴 날아
저보다 더 흰 꽃더미 속으로 사라지더니
꽃잎 되어 후두둑 진다
떨어진 꽃잎은 나비가 아니다
서둘러 봄이 간다
―「목련이 질 때」 전문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고 90년대에 우리신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의 평신도신학 발전에 기여한 부개동 성당 주임신부 호인수는 ‘인천 지역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로도 통한다. 그러나 그가 이미 시집을 두 권이나 낸 사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에 출간된 '목련이 질 때'는 40년 사제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25년 만에 내는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사제 생활 40년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4부로 묶은 시인의 고백록이자 시어로 표현한 사목신학이다. 시집은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견지하면서 살아온 한 사제의 고뇌와 내면 여정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신부님이 지나온 섬들과 바다와 꽃과 새, 삶과 사랑에 대한 찬사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것만 쓴 시들입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팔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진짜 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신부님은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 하나를 꼭 붙들고 사셨습니다.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것들, 가장 작은 존재들과 신부님이 맺은 관계들 안에 가장 귀한 것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지나가고 사라져버릴 덧없는 인연들이지만, 그 안에서 반짝이던 눈물이 실은 진주였습니다. 신부님은 질그릇 속에 보물을 안고 사셨습니다. ‘우리들의 신부님’이 되셨고, ‘우리들의 시인’이 되셨습니다.
―박경미(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호인수 지음 | 분도출판사 | 152쪽 |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