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 "원칙이 틀어지면 허명민주(虛名民主)가 됩니다"

신간 '다석 강의'

'다석 강의'에는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의 실정과 동서 냉전 같은 국내외 혼란한 상황에 대한 다석 류영모의 생각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연경반 강의에서 다석은 사회 병폐를 비판하곤 했으며, 특히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조건에 관해 여러 차례 강의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참 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대중이 옳은 의(義)를 분별하는 데 민주의 무게가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참으로 무게 있는 민주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중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가의 지도자와 관련해서는 "(지도자가) 밑을 밝혀줄 능력이 없으면 올라가 있을 필요가 없"으며, 거짓된 지도자 밑에서는 민주주의가 되더라도 잘살게 해줄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원칙이 틀어지면 허명민주(虛名民主)가 됩니다. 이름만 민주주의가 됩니다. 그러면 마귀가 참여하여 세상을 더럽힙니다. …… 이렇게 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만이 심해집니다. 자기 생각을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고, 남의 것은 보잘것없으며, 이 정도면 되었지 부끄러울 게 뭔가 하게 됩니다.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게 됩니다. 자만하고 시위(尸位)합니다. 혼자 잔뜩 부풀어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기말(世紀末)의 마귀들입니다. 이것을 가로되 세기말 현상, 곧 말세(末世)라고 합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좋은 세상에 그따위 마귀 때문에 귀하고 중한 것을 놓치다니 말입니다. 그냥 장난(作亂)으로 망(亡)하다니 말이 됩니까? (제29강 성령과 악령 · 707쪽)

인류의 역사는 밤낮 서로 싸움질하고 내려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놈을 물리치면 저놈이 들어옵니다. 소론(少論)이 승하면 노론(老論)은 기회만 보는 형국입니다. 악(惡)의 본(本)으로 서로 다투니 그 중간에서 백성만 부대끼고 못 살게 됩니다. 소위 혁명이 일어나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떠들어댑니다만, 혁명이 오면 무엇합니까?
희생자는 오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중에는 개죽음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지도자 밑에서 희생하는 것은 개죽음입니다. 앞문의 호랑이를 쫓으니 뒷문에서 이리가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장 보는 현실입니다. 봉건제도가 없어지고 민주주의가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습니까? 품앗이입니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흘러가는 그 짓이 전부 서로 하는 품앗이입니다. (제24강 인생관이 다르면 시비도 다르다 · 547쪽)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는 함석헌과 김흥호 등 20세기 한국 기독교 사상계를 이끈 거인들의 스승이자,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석학이다.

다석은 35년 동안 이어진 종로 YMCA 연경반(硏經班) 강의에서 스스로 지은 시조와 한시, 유교 경전, 성경, 불경의 경구를 직접 모조지에 써서 칠판에 붙여놓고 강의를 하였다. 다석의 강의는 예수와 붓다와 공자, 삶과 죽음, 절대 세계와 상대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을 넘나들었다. 방대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이 어우러지는 지혜의 향연이었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고, 때로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석 강의'는 제자들이 속기록으로 남긴 43편의 강의를 다듬어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다석의 철학과 사상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석은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다석 강의'가 출간되기 전까지 다석에 관한 책은 다석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이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였다. 다석의 제자들이 연경반 강의 기록을 간추려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속기록을 그대로 옮긴 책은 없었다. 그러다 2005년 2월 25일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졌고, 다석학회가 주도하여 연경반 강의 일 년 치 속기록(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 전문을 다듬어 2006년에 '다석 강의'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에 10년 만에 출간되는 '다석 강의' 개정판은 초판과 속기록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대조하고 확인하여 속기하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한자와 오·탈자를 비롯해 오류를 바로잡았다. 다석의 육성으로 펼쳐지는 43편의 강의를 통해,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능통한 석학이자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다석의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 책은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류영모 선생의 말숨은 빛과 힘과 숨의 구현이다. 눈을 뜨고 일어서고 날아가는 통일ㆍ독립ㆍ자유의 세계이다. 또한 선생의 세계는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너무도 신비하고 오묘하여 하나로 같이 통하는 세계이지 분석하고 따지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고 실천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분석하는 세계가 아니라 같이 기뻐하고 같이 즐거워하는 생명의 세계이다. _ 김흥호, '나의 스승 류영모' 중에서

강의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 그리고 오랫동안 쌓은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다. 때로는 맹자(孟子)의 말처럼 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하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 어떤 어려움에 놓여도 하느님 생각만 하면 기쁨이 샘솟아야 참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보여준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다. 삶은 기쁨이라고 한 선생의 말은 고달픈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_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YMCA 연경반 35년' 중에서

다석 류영모는 일생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었으며, 예수를 스승이자 삶의 모범으로 삼아 본받으며 좇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다석은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유교가 길은 죄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공자는 덕(德)이라 하고 석가는 법(法)이라 하고 예수는 얼(靈)이라고 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름만 다를 뿐 실체는 같다는 것이다.

류영모가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를 얘기한다고 해서 공자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이 사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간디나 톨스토이처럼 하느님 말씀의 국물을 먹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들과 비슷하게 하려는 것이 공자, 석가, 예수, 간디, 톨스토이를 추앙하는 것입니다. 간디가 누구인지,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지내야 합니다. 현대 사람은 간디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나 부처를 말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제21강 간디의 가르침 : 진리파지 · 458쪽)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입니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은, 종단은 절대인 '하나'에서 비롯하여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긴박한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신경쇠약에 걸려서 강박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람일수록 이 강박감을 먼저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은 절대인 '하나'에서 나와서, 마침내 '하나'를 찾아 하나로 돌아갑니다. 대사상가나 대종교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 를 구한다는 말이요, 믿는다는 것입니다. 신선(神仙), 부처, 도의(道義)를 얻는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제32강 '하나'를 알기 전에는 전부가 까막눈이다 · 763, 764쪽)

한학(漢學)의 대가였던 다석은 한자 한 글자에 철학 개론 한 권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자(破字)'를 하여 한자의 생성 원리를 밝히고 거기서 철학을 캐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말과 우리글을 아끼게 되었다. 다석은 자신이 궁구한 이 세계와 존재의 의미를 서양에서 만들어진 철학 용어나 중국의 한자가 아닌 순 우리말, 우리 글자에 담아내고자 했다. 다석은 훈민정음 28자에 만족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소리글자인 한글이 마치 뜻글자인 양 글자 하나 하나의 뜻을 곰곰이 새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오!늘'이라고 풀이했다. 오늘 하루가 늘상, 곧 영원이라는 뜻이다. '글(文)'은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여기서 이렇게 말하지만 후에 우리나라 철학이 있게 되면 이 말 역시 죄다 쓰일 것입니다. 이 말 그대로 쓰인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이 나오면 그 말을 쓰고, 그러지 못하면 이 말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민족에게 철학이 필요하면, 누가 되었건 우리말로 철학용어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있어서 우리 몸이 있는 것같이, 우리가 쓰는 말도 꼭 필요한 자식처럼 필요한 말이 마침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제29강 성령과 악령 · 687쪽)

'이이ㅣ수ㅣ'… …, 예수의 '예'는 ㅣㅓㅣ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수', 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가 말하는 구원의 힘입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는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한글과 뜻이 우연히도 같습니다. 우리말이 웬일인지 하느님의 계시를 필름처럼 나타내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진리가 '예'에,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 퍼졌는데, 우리가 사는 '수'가 정신에 있다는 그림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이런 글을 궤변이니 불경(不敬)이니 하겠지만,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말로 이보다 더 적절하게 나타낸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41강 영靈을 알려면 먼저 못난 '나'를 깨달아야 한다 · 943쪽)

다석은 종교의 핵심을 죽음이라고 보았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였다. 또 다석은 '오늘 하루살이(일일일생, 一日一生)'의 철학으로 잠자는 것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영원을 하루 속에서 살고, 하루를 평생으로 여기며 매일 죽는 연습을 했다. 다석에게 목숨이란 "영혼이 잠깐 동안 이 흙덩어리(몸)에 들어와서 피게 하여주는 것"이었다.

사랑은 믿음이고, 생명을 내버리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 내가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한다는 뜻입니다. 인(仁)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몸을 내던진다는 뜻입니다. 자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은 이 살신성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면 죽음의 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누구에게 배워서만이 아니라 절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이고 생명은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뚜렷해지는 것은 영혼인 생명입니다. (제39강 우리는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이다 · 911쪽)

생명은 영원한 것을 하늘의 명령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어 온 생명을 무한 중에서 잠깐 누리는 것입니다. 잠깐 꿈을 꾸는 것입니다. 내일 꿈이 깨면 다 그만입니다. 꿈 깨면 다 시원합니다. 부천(富賤)의 차(差)가 없이 난(難)은 다 같습니다. 부잣집 자식이나 대통령의 양자(養子)나 난(難)은 다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해야 하고, 알았으면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제29강 성령과 악령 · 700쪽)

다석 류영모는 일평생 배움의 길을 걷고자 했으며, 정신은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다석은 훗날 연경반 강의에서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교육열은 대단한데 좋은 재목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그냥 몸뚱이를 키우는 일"만 한다고 지적했다. 공부란 본(本, 근본)을 캐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과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결국에는 "하느님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글자 '몸'에서 가로로 그어 있는 것은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죄다 모아 몸이 잔뜩 붓게 되면 앉아 있으려 해도 편히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을 전제로 공부를 할 바에는, 아예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을 배워 가지고 나온 학생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학교를 나와서 매이려고만 하고 모으려고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하느님과는 융합이 되지 않습니다. 꿈꾸는 이 세상에서 꿈꾸고 지나가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이처럼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집어치워야 마땅합니다. (제11강 몽땅 놓아야 자유롭다 · 252쪽)

종국엔 그저 껍데기(몸)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려면 마땅히 하늘을 알아야 합니다. 다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 뜻의 뜻,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을 정하려면 그칠(止) 줄을 알아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알고 어려서부터 외곬으로 운동 선수가 되겠다거나 전문 기술에만 능해보겠다는 것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육은 그 근본을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 두어야 합니다. 운동이나 전문 기술만 가르치는 것을 교육으로 알면 그것은 도둑놈의 교육입니다. (제19강 하늘의 길을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 412, 413쪽)

다석 류영모 (강의) , 다석학회 (엮음) 지음 | 교양인 | 1006쪽 | 3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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