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마흔이 됐을 무렵 20대 초반의 A씨을 알게 됐다. A씨에게 희귀질환과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둘은 2005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2007년 10월.
첫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때부터 일곱 살 터울인 A씨의 여동생이 언니의 집을 다녀갔다. 몸이 아픈 언니 돕기를 위해서였다. 여동생도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언니보다는 덜했다. 여동생은 언니를 대신해 조카를 보살폈다.
2008년 2월 혼인신고를 한 A씨는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둘째를 임신했다. 여동생은 조카와 언니를 계속 돌봐야하는 처지가 됐다.
2008년 8월. 여동생은 작은 방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바깥 일을 마치고 온 형부는 당시 19살이던 처제를 범했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처제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자칫 언니와 관계가 틀어질까봐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반복됐다는 점이었다.
언니는 뒤늦게 자신의 남편이 여동생에게 한 짓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된 출산과 오랜 투병생활에 지쳐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남편 이외에는 의지할 곳도 없었다. 언니도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끝내지 못했다.
얼마 뒤. 이번에는 시집도 안 간 처제가 임신을 했다. 형부의 성폭행 때문이었다. 가족과 상의 끝에 처제는 아기를 낙태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처제와 형부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졌나갔다.
2010년 4월 형부와 언니는 처제를 남겨두고, 살던 곳과 아주 멀리 떨어진 서울로 이사를 갔다. 이후 부부는 경기도 김포에 정착했다.
처제도 새 삶을 준비했다. 모든 것을 잊고 새 출발을 다짐했다. 결혼을 하고 2012년 8월 딸을 낳았다.
하지만 작은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형부가 잘 살고 있는 처제의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처제는 딸 양육권도 포기한 채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2012년 12월. 갈 곳이 없던 처제는 다시 언니의 집으로 왔다. 자신을 괴롭혔던 형부는 일을 하다 머리를 다쳐 병원에 장기간 입원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제는 몸이 아픈 언니를 대신해 살림을 하고 조카 두 명을 보살폈다.
2013년 초. 형부가 병원으로부터 외박허가를 받고 집으로 왔다. 그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자고 있는 처제를 범했다.
2013년 12월. 처제가 남자 아기를 낳았다. 형부의 아기였다. 출산을 원치 않았지만 낙태시기를 놓쳐 어쩔 수가 없었다. 출생신고는 형부와 언니 이름으로 했다. 처제는 창피해서 아기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는 끝내 모유수유를 하지 않았다.
첫째 출산 이후 처제는 2014년 12월, 2016년 1월 아이를 출산했다. 모두 형부의 아기였다. 전 남편 사이에서 있었던 딸을 포함하면 3년 6개월 동안 무려 4명의 아이를 출산한 셈이었다.
산후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처제는 산후우울증에 시달렸다.
형부는 사기죄로 처벌까지 받아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다. 형부, 언니, 처제, 두 명의 조카, 그리고 세 명의 아이.
여덟 식구는 국가보조금을 받아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집안 살림, 육아는 모두 처제의 몫이었다.
형부는 매일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아이들을 학대했다.
첫째 아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뒷짐을 친 채 거실 바닥에 머리를 박게하는 이른바 '원산폭격'을 20분동안이나 시켰다.
둘째인 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둘째 딸의 뺨을 때렸다. 어떤 날은 시간을 물어봤는데 대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벽시계로 딸의 머리를 내리쳤다.
다음은 셋째. 그러니까 처제의 첫째 아이였다.
어느날 형부는 유아용 좌변기에 셋째를 강제로 앉혔다. 두 살배기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형부는 효자손과 파이프를 좌변기에 꽂고 병원용 반창고로 아이를 고정시켰다. 아이는 좌변기에서 20여 분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셋째는 커 갈수로 형부의 외모를 닮아 갔다. 말썽도 많이 부렸다. 평소 형부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한 처제는 셋째를 볼 때마다 형부를 떠올렸다. 자신이 낳았지만 미워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문제의 2016년 3월 15일 오전.
처제는 셋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준비를 했다. 언니는 1주일 전부터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그러다 셋째가 동생 분유를 몰래 먹은 것을 알았다. 처제는 셋째를 거실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뺨을 세차게 때렸다. 셋째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셋째를 데리러 온 어린이집 선생님이 뺨이 붉은 이유를 물었지만 처제는 '집이 더워서 뺨이 붉어진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오후 4시. 어린이집에서 셋째가 돌아왔다. 처제는 셋째에게 '도시락 가방을 달라'고 했다. 아침에 엄마에게 맞은 것이 생각났는지 아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처제가 가방을 뺏자 셋째는 처제를 향해 소리를 지른 채 거실에 드러누웠다.
처제도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했다. 처제는 거실에 누워 있던 셋째의 허리를 발로 밟았다. 이후 아파하는 아이를 작은방으로 끌고 들어가 배를 힘껏 찼다. 셋째는 배를 감싸고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뒹굴었다. 아이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구토를 했다.
하지만 처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폭행은 이어졌다. 아이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처제는 뒤늦게 셋째를 병원에 데려 갔지만 이미 늦었다. 췌장이 끊어지고 장간막이 파열된 상태였다.
다음날. 사건은 곧바로 언론을 타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살인이었다. 여론은 폭발했고 '비정한 이모', '패륜 이모' 등 온갖 수식어를 붙이며 처제를 비난했다.
얼마 뒤 수사를 받던 처제가 입을 열었다. 죽은 셋째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 그리고 처제는 지난 8년간 자신에게 있었던 지옥같은 일들을 털어 놓았다. 처제는 고개를 떨구고 혐의를 인정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한 생명이 사라진 것을 후회했다.
사건의 실체가 알려지자 처제를 비난하며 들끓었던 여론도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형부는 반성하지 않았다.
"처제가 먼저 나를 유혹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처제를..."
형부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수사가 시작되자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했다.
2016년 9월 23일. 사건 발생 6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났다.
처제에게는 징역 4년이 선고됐다. 살인인데도 형량이 크게 낮았다. 강간, 성폭행, 네 아이의 출산, 지적장애, 산후우울증. 재판부는 처제에게 발생한 비극적인 상황을 형량에 참작했다.
형부는 징역 8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처제를 강간하고 수사 당시 거짓말을 했던 점. 평소 아이를 학대했던 점 등이 반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