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자들의 희망이었던 열풍의 주인공 버니 샌더스가 패배한 뒤 실용 중도주의자인 힐러리와 급진 보수주의자인 트럼프가 대결을 벌였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민심은 합리와 실용과 중도의 편에 섰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정치사를 돌아볼 때 힐러리의 정책과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미국과 세계는 힐러리 클린턴의 기나긴 인고에 대한 대가로 그의 불투명한 손에 세계 최고의 권력을 맡길 것일까? 힐러리 클린턴의 진정한 얼굴은 무엇이며 앞으로 미국 정치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이 책 '힐러리 클린턴은 누구인가?'는 완벽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이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견해를 제공하며 미국 정치사의 변화와, 시대가 부른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의 흐름을 되짚어줄 것이다.
힐러리의 중도 실용주의 노선은 논쟁의 중심이었다. 국무부 장관으로서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뒤 힐러리는 대중으로부터 아직까지 비난을 받고 있지만, 똑같이 찬성표를 던진 진보주의자 존 에드워즈 의원에게 대중은 더 관대했다. 힐러리와 오바마의 외교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전쟁과 평화'라는 상반되는 이미지로 평가되었다. 힐러리는 이중적이고 비밀스럽고 권력 지향적이라는 보편적 인식에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이 더해 남성 정치가들보다 더 가혹한 이중 잣대로 평가받곤 한다.
진보 성향인 민주당의 후보로서 힐러리는 시민과 노동자, 동성애자, 미혼모와 공교육, 보다 나은 일자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국무부 장관 시절 외교 면에서는 네오콘 입장과 같던 강경주의 노선을 보였다. 거대 기업과 금융가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후원받고 있으며, '트래블게이트'와 '화이트워터 스캔들' 등 여전히 풀리지 않은 온갖 의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워싱턴 정가에 발을 들여놓기 전 변호사로 일할 때에도 종종 불투명한 기업가들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양극화와 불평등한 경제를 바로잡겠다는 힐러리의 선언에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보수주의 외교정책에 우호적이던 견해와 행보는 더 심각한 문제다. 힐러리는 이라크전쟁에 찬성표를 던졌을 뿐 아니라 무인비행기의 폭격과 시리아 강경 응징을 지지했다. 또한 1993년 퍼스트레이디로서 의료보험 개혁을 주도하면서 배후에 거대 보험사들의 이권을 끼고 있다는 비난을 받으며 정책 면에서도 큰 실패를 맛보았다. 그 모든 과정이 불투명했다는 지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2008년 대통령 경선 과정에서는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라는 대립 구도를 양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녀인가 잔 다르크인가? 소크라테스의 악처인가 멕베스 부인인가? 진보 여성주의자인가 보수 기득권자인가? 유능한 퍼스트레이디인가 세기의 성추문 피해자인가? 중도 실용주의 정치가인가 권력 지향 기계인가? 합리적 평화주의자인가 전쟁 지지자인가? 가난한 약자의 대변자인가 거대 기업의 검은 수혜자인가? 힐러리 클린턴의 정체성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미국 정치사에서 보다 진보적이며 평화적인 노선을 구축해온 민주당은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설계할 때 군사 문제에서 곤란을 겪는다. 미국의 외교정책 및 국가안보 관련 기관들은 너무나 비대해져서 통제 불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동 및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있어서 힐러리는 분명 전쟁 지지자로서 비판을 받았으나, 보다 실무적 균형적인 차원에서 중대 업무를 수행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힐러리는 늘 '보다 작은 발걸음들'로부터 변화가 일어난다고 믿었고 정치적으로 실천했다. 안드레아 번스타인은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복무할 당시, 작고 쉬운 변화를 중시하는 정치 스타일에 뉴욕 민주당원들이 열광했다고 표현한다. 양극화, 다변화가 심각해지는 미국 국내와 세계 정치에 중요한 부분이다. 타라 맥켈비는 '하드 파워'가 아니라 '스마트 파워'를 강조하는 힐러리의 합리적 실용주의를 높이 평가했다. 국무부 장관 당시 여성 문제, 시민과 노동자의 권리, 교육과 올바른 양육 방식을 끊임없이 논쟁의 장에 올리며 의식을 깨웠다.
힐러리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진보의 길을 선택했고, 정치적 승리와 실행을 위해 전직 대통령인 남편을 포함한 모든 모멸감을 견뎌내고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이중성과 기회주의자로 비판받는 힐러리의 진영 논쟁은 사실상 합리적 실용주의의 한계에 따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힐러리가 자유주의의 아이콘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유주의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즉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여자, 어린이, 노인을 위해 싸운다. 무엇보다 그녀는 강인하며, 또 이기는 법을 알고 있다." 미국 진보주의 센터 수장인 존 포데스타의 말이다.
이제 '클린턴'이라는 이름은 세기의 추문을 일으키고도 재선에 성공한 빌 클린턴이 아니라, 권력욕에 대한 혐의와 성차별 속에서 중도와 합리, 실용주의 노선을 지켜내며 이번 세기에 커다란 획을 그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크라이트너 지음 | 이경식 옮김 | 한국경제신문사 | 472쪽 |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