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판 아줌마의 힘'…상품 아닌 정(情)을 팔아요

'야쿠르트 아줌마'‧'아모레 카운슬러'…21세기에도 건재한 보부상 DNA

야쿠르트 아줌마 정옥순(왼쪽) 씨와 아모레 카운셀러 정현정 씨. (사진=자료사진)
보부상은 고대사회부터 내려와 조선 후기에 번성한 전문 상인이다. 세공품이나 사치품 등을 보자가에 싸서 들고 다니던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일용품을 등에 지고 다니며 팔던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을 합친 말로 마을에서 마을로 소비자를 직접 찾아가 물건을 팔았다.

보부상은 일제의 말살 기도로 거의 소멸됐지만 그 명맥은 '방문판매'라는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세상을 휩쓸고 있는 21세기에 새로운 판매방식으로 각광받으며 부활하고 있다.

◇ 우리동네 수호천사…물건이 아닌 정(情)을 판다

1970년대 배우 태현실 씨를 야쿠르트 아줌마 모델로 내세운 한국야쿠르트 광고. (사진=한국야쿠르트 제공)
방문판매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과 사람이 1대1로 만나는 '대면 판매'라는 것이다. 방문판매자들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거리든 고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간다.

그리고 물건을 팔지 않고 정(情)을 판다. 그 빠르고 편리하다는 TV홈쇼핑과 온라인·모바일 쇼핑이 절대로 근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방문판매의 상징인 한국야쿠르트의 '야쿠르트 아줌마'는 1971년 8월부터 무려 45년간 우리 곁을 지켜왔다.

한국야쿠르트 상암점의 야쿠르트 아줌마 정옥순 씨가 전동카트를 몰고 배달을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1만3000여 명의 야쿠르트 아줌마는 야쿠르트를 파는 상인이 아니라 우리의 언니, 누나이고 동생과 딸이다.

지난해 2월부터 남편의 권유로 야쿠르트 아줌마가 된 정옥순(36·강서지점 상암점) 씨는 "배달만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면서 "심지어는 호박을 샀는데 썩지 않았느냐고 물으시기도 하고 자식이 속썩인다며 푸념을 하시는 등 속내를 털어놓는 분들도 많다"고 전했다.

제품을 매일 원하는 곳으로 직접 갖다준다는 편리함도 가족과 같은 정을 나눌 수 있다는 살가움에는 밀린다.

야쿠르트아줌마 정옥순 씨가 고객에게 배달한 제품을 고르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서울 상암동의 이점순(57) 씨는 "그날그날 신선한 제품을 가져다주는데 매일 보다보니까 친동생 같다"고 정 씨를 반겼다. '피부가 좋다'는 기자의 말에 "야쿠르트 먹어서 그렇다"는 공치사도 곧바로 나왔다.

상암동의 한 음식점에서 일하는 김향자(55) 씨도 "일하다가 신선한 제품을 바로 먹을 수 있어서 좋고 매일 봐서 정도 들어서 좋다"고 말했다.

자녀 2명의 엄마인 정옥순 씨는 "집에서 장신구를 만드는 부업만 하다가 야쿠르트 아줌마로 처음 사회에 나왔는데 처음에는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서 물건만 놓고 도망치듯이 나왔다"면서 "이제는 고객을 만나는 게 재미있어서 하루가 금방 간다. 주변에서 야쿠르트 아줌마 하면서 얼굴이 밝아졌다고 한다"며 활짝 웃었다.

◇ 개인 인생 카운셀러…화장이 아닌 '삶'을 바꾸다

아모레 카운셀러 정현정 수석마스터(왼쪽)가 메이크업 방법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이하 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화장품업계에도 야쿠르트 아줌마 못지않은 방문판매 조직이 있다. 역사와 규모는 오히려 능가한다. 1964년에 시작돼 3만6000여 명이 영업 중인 '아모레 카운셀러'다.

K뷰티 열풍을 타고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아모레퍼시픽의 토대를 마련한 주역들인 아모레 카운셀러는 외모를 가꾸는 화장품을 다루는 만큼 대면 판매방식에 더욱 특화돼있다.

각종 스트레스와 환경적 요인으로 민감성 피부가 점점 늘어가는 상황에서 아모레 카운셀러는 개인 전용 미용 상담사로서 디지털 시대에도 존재 가치가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지난 2006년 입사해 아모레 카운셀러 최고 단계인 수석마스터가 된 정현정(45·은평특약점) 씨는 "오랫동안 관계를 맺다보니 고객의 피부 상태를 한눈에 파악해 적합한 제품과 화장법을 제공할 수 있다"면서 "인터넷과 TV홈쇼핑은 물론 백화점 등의 매장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모레 카운셀러 정현정 수석마스터(오른쪽)가 고객들에게 화장법을 조언하고 있다.
정 씨의 10년 고객인 안미영 원장(51·녹번동 헤어리더스)은 "피부 트러블이 나서 버린 화장품이 많은데 현정 씨가 권해준 제품과 화장법을 썼더니 정말 피부가 좋아졌다. 손님들이 '얼굴에 무슨 시술했느냐'고 묻기도 했다"면서 "백화점에 가면 비싼 제품만 권해서 호갱이 된 기분인데 현정 씨는 제 상황을 아니까 가격 면으로도 맞춤형으로 맞춰준다"고 엄지를 쳐들었다.


역시 10년 전 같은 초등학교 학부모로 만난 유수경(47·홍은동) 씨도 "피부가 예민한 편인데 10년을 봐왔기 때문에 피부 상태를 보고 그에 맞는 제품을 권해주는데 틀림없다"면서 "화장품이 떨어질 때를 미리 에상해서 필요한 제품을 가져다주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메이크업을 해주기도 하는데 매장에서는 불가능한 서비스"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두 고객 모두 최고로 꼽은 것은 마음을 나누는 만남이었다.

아모레 카운셀러 정현정 수석마스터(오른쪽)가 '메이크업 유어 라이프' 행사가 끝난 뒤 한 여성 환우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정현정 씨는 "다른 판매채널처럼 판매만 하면 끝이 아니라 방문 전에 고객을 생각하며 제품부터 화장법까지 고민한다. 마음가짐 자체가 다른 정(情)을 담은 판매라고 생각한다"면서 "살기 어렵고 각박한 세상에서 고객과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고민과 얘기를 들어주는 게 제몫이고 제 영업활동의 바탕"이라고 강조했다.

정 씨는 아모레 카운셀러 제도는 진정한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판매채널이라며 앞으로도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세 아이의 엄마로 사회일선에 나섰던 정 씨는 "6년 전 길거리 홍보 때 상담했던 고객께서 방문을 시작한지 3개월만에 외모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자신감에 찬 전혀 다른 여성으로 변모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이제는 큰언니와 같이 대해 주시는 그 고객처럼 삶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정 씨는 5년 전부터 아모레퍼시픽의 메이크업 유어 라이프(Makeup Your Life)를 통해 여성 암 환우들이 화장을 통해 투병 과정에서 자신감과 생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뷰티(Beauty·화장) 카운셀러가 아닌 라이프(Life·삶) 카운셀러가 되고 싶습니다". 정 씨의 목표다.

◇ 21세기, 다시 각광받는 보부상 DNA

야쿠르트아줌마 카트 변천사. 왼쪽부터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사진=한국야쿠르트 제공)
방문판매 조직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상당하다.

지난해 한국야쿠르트 매출 9372억 원 중 야쿠르트 아줌마가 올린 매출은 95%를 차지한다. 아모레퍼시픽 매출 4조6245억 원 중 아모레 카운셀러 비중은 14.1%다. 각각 8900억원, 6520억원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투자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야쿠르트는 2년간의 연구 개발을 거쳐 이동형 냉장고를 장착한 탑승형 전동카트를 개발해 지급했다.

8시간의 충전으로 야쿠르트 아줌마가 발판 위에 탑승해 시속 8㎞로 이동하고 24시간 냉장 보관을 할 수 있어 보다 신선하고 신속한 배달이 가능해졌다.

2014년 12월부터 현장에 지급된 전동카트의 가격은 대당 800만원. 한국야쿠르트는 내년까지 1만대를 지급할 계획인데 관리비용까지 총 900억원이 투입된다.

지난 4월 열린 제17회 아모레 카운셀러 대회에서 아모레퍼시픽 메이크업 유어 라이프 자원봉사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은 2000년대 들어 유통채널의 다양화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아모레 카운슬러들의 위상이 흔들리자 2003년 업계 최초로 PDA(휴대정보단말기)를 도입해 실시간 데이터 분석으로 통한 고객관리에 나섰다.

또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자 전용 앱을 개발해 고객 분석과 피부 검사·각종 정보 조회·인터넷 주문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다른 업체들도 방문판매 또는 비슷한 형태의 판매방식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지난 2002년 4월부터 고가 브랜드 위주로 방문판매 사업을 시작해 현재 2만여 명의 뷰티 컨설턴트가 전체 매출의 10%를 책임지고 있다.

아울러, 소셜커머스업체 쿠팡의 로켓배송도 로켓맨의 직접배송을 통해 신뢰도를 높이는 방문판매의 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TV홈쇼핑과 은행 등에서도 방문판매 기법을 점차 도입하고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옛 것에서 새 것을 찾는다).

오랜 세월 한국인의 정(情)을 타고 전해내려온 보부상 DNA가 모바일 시대에 새로운 판매채널로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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