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의 집이란 ? 차 한잔, 책 한권

프랑스 소설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 마르탱 파주 지음

"모든 사람이 각자의 내면에서 살아간다면,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안락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더는 전쟁도 없을 것이다...물론 그녀에게도 나처럼 자기 내면에서 살아보라고 권유할 것이다... 아무튼 그녀가 나와 함께 나의 내면으로 이사를 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면에서 살게 된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더 가까워졌다... 내면에 산다는 것, 그것을 친근한 장소에 사는 것인 동시에 낯섦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하늘이 없고, 수평선도 없다. 아주 넓어 보이지는 않지만 한계도 없다. 그렇다고 무한에 닿아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나의 발걸음이 닿으면 공간이 열린다는 의미이다. 내가 사는 집의 크기는 나의 탐험의 진보에 달려 있다.
나는 저녁이면 신발털이에 발을 닦고 거실로 가서 구두를 벗는다. 그리고 차 한잔을 준비한 다음 책을 집어 들고 오래된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 순식간에 어깨의 긴장이 풀린다. 내가 여기, 진정한 나의 집에 있기 때문이다. '집에 있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겨우 알아가기 시작했다." -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내 집 마련하기」에서

진정한 나의 집이란? 인용글의 저자는 차 한잔, 책 한 권이라고 했다. 여기서 진정한 나의 집이란 내면이 집중된 공간을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가는 곳에 몸이 머물러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던가. 이 가을에 차 한잔, 책 한권을 음미할 수 있는 공간에 머무리고 싶다.


프랑스 작가 마르탱 파주가 실존하는 개인과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소설집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를 펴냈다. “당신은 35년 동안이나 습관적으로 타성에 의해 당신으로 살아왔어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좋지 못한 습관인 거죠”라는 말로 삶의 방식을 정면으로 부정당하거나 “당신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닙니다”라는, 평생의 믿음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선고를 받는 일곱 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현실과 비현실, 정상과 비정상의 교묘하게 허물어진 경계에 서 있다.

어느 날 아침 찾아온 경찰에게서 죽음을 선고받은 남자의 이야기 「대벌레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작가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 속 숨은 비밀을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당신 대신 살아주겠다’는 제안에 자기 자신에 대한 혼란과 의심 속으로 빠져드는 표제작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를 지나 ‘인간이라는 종’을 돌아보게 만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남자」,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직업과 가장 안전한 집을 찾는 청년들의 이야기 「평생직장에 어울리는 후보」와 「내 집 마련하기」 등 짧은 소설들은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환기한다. 개인에서 인간 사회로 이어지던 주제의식은 인간 중심주의를 풍자하는 「벌레가 사라진 도시」와 일상 곳곳에 숨은 음모를 찾아내는 실업자의 분투를 그린 「세계는 살인을 꿈꾼다」에 이르러 완성된다.

인간 존재가 생산성과 동일시되고, 자본 가치로 환산되는 물질 중심의 질서 아래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실존과 존엄을 거듭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번번이 ‘세계’라는 견고한 벽 앞에 꺾이고 만다. 그 벽은 때로 경찰이고, 대중이며, 과학이거나 사회체제이다. 결국 그들은 외계가 지정해준 운명에 순응하거나 그럴싸한 허위의 포장지로 자신을 보호하며, 심지어는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곳에 스스로 유배된다.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는 낯설지만 익숙한, 허구로 드러낸 현실이다. 소설집 곳곳에 포진한, 인간의 사회가 낳은 인간소외는 오늘날 세상의 벽에 가로막혀 삶의 가치들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어떤 책과도 닮지 않은 그런 책을 쓰고 싶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나를 놀라게 만드는 책. 그런 책을 씀으로써 내 안의 창고들을 에너지와 지략과 감미로움으로 채우고 싶다. 그런 책은 모든 조악한 것들과 어려움과 불안을 아름다운 무언가, 온갖 상처를 아물게 하는 무언가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탱 파주

책 속으로

“만일 내가 죽었다면 당연히 나도 그 사실을 알았겠죠.”
“난 철학자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계속 그렇게 살해당한 사실을 부인하고 고집을 부리면, 판사가 당신을 허위 증언으로 고소할 수도 있어요. 그런 삐딱하고 반항적인 태도도 공공질서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단지 상식이 통하는 이야기를 하자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전혀 논리에 맞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신의 권리긴 합니다. 우리 프랑스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내놓은 건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만, 우리가 내놓은 법적인 추론은 증거를 기반으로 한 겁니다. 안 그러면 별별 의견이 다 나와서 판치는 무법천지가 될 테니까요. 질문하고 싶군요. 당신이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대벌레의 죽음」 중에서, 23-24p

“당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달이 됐어요. 당신에 대해 정말 많이 연구하고 공부했죠. 당연하지 않겠어요? 아무나 되는 모험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특별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모든 걸 다 망치고 있더군요.”
“난 내 삶에 만족해요.”
낯선 남자가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필립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답이 너무 빨랐어요. 상대에게 믿음을 주고 싶다면 그 점에 주의해야 해요. 그런 제스처에는 아무도 속지 않거든요.”
“나에 대해 알아봐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요. 누군가가 엿보고 있다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에요.”
“오, 걱정 마세요. 당신의 삶은 그리 독특하지도 참신하지도 않으니까. 다만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당신의 삶은 쉽게 모방할 수 있는 삶이었어요. 그래서 당신을 택했죠.”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 중에서, 79-80p

“다행입니다. 당신은 이제 보호를 받게 됐어요.”
“뭐라고요?”
트리스탕이 물었다.
“당신은 보호 관리를 필요로 하는 멸종 위기종 목록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트리스탕은 서류를 읽었다. 과연 모르방 지방의 멸종 위기에 있는 조류 2종과 파충류 1종, 양서류 1종 그리고 풍뎅이과 곤충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이 보호 관리종의 목록에 들어 있었다. 라틴어식 성과 이름으로.
트리스탕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상징적인 조치로군요.”
생물학자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뇨, 전혀 상징적인 게 아니에요. 우린 당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호모사피엔스 인슐라리 종을 보존해야만 해요. 이런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정부가 당신의 보호 관리를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남자」 중에서, 102-103p

욕실 거울 속에서 만나는 낯선 남자는 알베르의 삶에서 알베르를 밀어내고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의 삶을 곤죽처럼 만드는 데 모든 일상을 써버렸다. 알베르, 그는 이제 그 낯선 남자에게 반기를 들어야만 했다. 더 지체했다가는 다시는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알베르는 영영 소멸되고 말 터였다. 기름진 지방으로 뒤덮인 육체, 그 지방의 주름살 속으로 영원히 실종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다시 경사로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사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숨이 찼고, 조금만 힘을 써도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가지 심각한 심장 질환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알베르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고, 사회는 그 쓸모없는 존재를 제거해가고 있었다. 실업은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그를 소멸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
「세계는 살인을 꿈꾼다」 중에서, 175p

마르탱 파주 지음 | 김주경 옮김 | 캉탱 포콩프레 그림 | 열림원 | 192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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