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영상 화면에 펼쳐진 빙벽과 암벽, 눈 덮인 바위와 나무들, 그리고 짙게 흩날리는 눈발과 휭휭거리는 거센 바람소리. 45분 분량의 이 영상은 설악산 토왕성 폭포의 장엄한 광경과 그 주변 겨울 바위산의 모든 변화, 느리게 또는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풍경이 펼쳐지는 화면 위로는 소설 '입석부근'의 문장들이 화선지에 유려하게 써내려가는 붓글씨처럼 세로체 자막이 좌에서 우로 흘러간다. 시적인 그 문장들은 응축된 힘을 뿜어낸다.
"-돌은 모두의 출발점, 꽃들도 눈물도 투쟁도 모두 내일을 위하여… 그날, 아마 우리들은 함께 출발할 것이다-"
"괜찮아?" 자막은 두 차례 등장하는데 처음과 나중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첫 번째 "괜찮아?"는 암벽 등반 일행에게 격려하는 마음이 느껴지지만, 두 번째 "괜찮아?"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죽음을 앞두고 좌절 하는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 두 번째 장면의 카메라 앵글은 중턱에서 정상으로 향하고, 이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펼쳐진다. 비장한 음조의 관악기 소리가 죽은 이를 추모하듯이 깊고 애절하게 관객의 가슴을 후빈다. 소설의 문장과 영상의 풍경이 완전히 합치되는 대목에서는 탄성이 터진다. "그의 허리에는 내가 잡고 있는 자일이 팽팽하게 매어져 있었다. 나에겐 그것이 둘의 혈관이라고 느껴졌다." 이 문장이 흐를 때 얼음 속에서 물이 흐르는 장면이 생생히 펼쳐진다. 마치 그것이 혈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면 중간에 더러 하얗게 공백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장 작가는 "소설 '입석부근'의 소년들은 어디로 간 걸까? 흐르는 물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러한 생각에 대한 은유로 블랭크 처리를 했다. 이 소설의 문장이 흘러가는 물처럼 표현된 것도 이 소년들의 이야기가 땅으로 스며들었나 증발 되었나? 이를 은유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박진감과 휴지(休止),긴장과 이완으로 구성된 영상 작품은 45분이 언제 지났나 싶게 흘렀다.
이 영상작품의 여운이 너무나도 강해 소설 '입석부근'을 들춰보았다. 나는 10대 때 황석영 작가가 쓴 '입석부근'을 만나며 정 작가가 전율한 이유를 알았다.
한 대목을 보자.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작업은 모험이 아니며, 산과 나를 합쳐지게 하려는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땅 위에 검은 그림자를 끌고 다니듯, 불만과 열등감과 자의식을 어두운 생활 속에 끌고 다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리적인 암벽작업에 정신을 불어넣고, 우리의 싱싱하고 자유스러움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바위라고 가정해봤을 뿐이었다." 10대 때 이런 사유를 할 수 있는 작가에게 후세대로서 고마움을 느낀다. 그의 문학적 천재성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후세대에게 10대의 빛나는 정신과 야성, 자유의 전범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시 기간 : 2016. 9.21 - 10.2
전시 장소: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갤러리 지하 2층 플랫폼-라이브(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133길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