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에서 19일 또다시 규모 4.5의 여진이 발생했다. 앞서 12일 발생한 규모 5.8의 강진에 이은 것이어서 한반도 지진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지진이 일어난 경북 동해안 지역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해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국가로 꼽힌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2016년 9월 현재 한국에서는 24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다. 여기에 6기의 원전이 추가로 건설 중이며, 4기의 건설 계획이 정부의 전력수급 계획에 반영되는 등 증가세에 있다. 특히 최근 지진이 잇따르고 있는 경북 동해안에는 경주 월성원전 6기, 울진 한울원전 6기, 울산 고리·신고리 원전 6기 등 원전 시설이 대거 몰려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측은 지진에 따른 영향 없이 원전이 안전 운전 중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국민들은 쉽사리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한국과 일본 지식인들의 좌담 내용을 담은 책 '후쿠시마 이후의 삶'(한홍구 외·반비·2013)에서는 원전을 '희생의 시스템'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타인의 생활이나 생명, 존엄 등을 희생한 위에서만 이익을 내고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그 이익을 취하고 유지하는 자들은 결국 국가권력이나 자본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내버리고, 국민 이외의 존재를 무시하는 문제점은 각 나라의 원전 추진 세력들이 공유하는 특성입니다. 나아가 원전뿐만 아니라 핵무기 문제를 포함해 핵을 둘러싼 정치, 경제, 군사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닌가 합니다." (77쪽)
세월호 사건과 겹치는 '터널', 친일청산이라는 과거사 문제를 건드린 '암살'과 '밀정', 정치·경제·언론 권력의 유착을 꼬집은 '내부자들' 등, 한국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끄집어내 대중에 알리고 있는 영화계에서 이번에는 원전 문제를 건드린다. 내년 설 즈음 개봉이 예정된 영화 '판도라' 이야기다.
100억 원대 제작비를 들인 '판도라'(감독 박정우)는 강진 뒤 원전 냉각 파이프 뒤틀림으로 방사능이 유출될 위기 상황에서 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한반도가 원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원전 마피아'로 불리는 관련 업체·공무원의 유착 등 원전 비리까지 다루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 김남길이 원전 엔지니어를, 김명민이 대통령을 연기한다.
◇ "한국 재난영화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쨌든 사람들에게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 문제들을 알고 싶다는 바람이 있고, 그런 니즈가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어디서, 무엇으로 흡수할 수 있는가라고 했을 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를 많이 받아들였어요. 실제로 그런 영화들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것이 일반화됐고요. 그것을 카타르시스적으로 다루느냐, 고발 차원에서 다루느냐, 그보다 훨씬 심화된 형태로 다루느냐라는 선택의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사회 문제를 영화 안으로 흡수하고 그것을 다루는 것이 흥행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관객들의 니즈에도 부합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영화계 내에 있는 거죠."
그는 "현재 지진, 원전 관련 주요 언론 보도만 봐도 아무 근거 없이 '안심해라'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만 말하니 사람들은 더 안심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사람들은 한국의 핵발전소가 지금처럼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원전을) 계속 짓고 있고, 줄이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아는 거죠. 영화 '판도라'가 제작될 당시에는 한반도 지진에 대한 이슈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강력한 경고로 다가오고 있어요. '판도라'가 영화 '해운대'(2009)처럼 재난이 일어났을 때의 스펙터클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둘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훨씬 더 심층적으로 '재난의 성격이 무엇인가' '재난이 벌어졌을 때 국가대책은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라는 것까지 파고들 수도 있겠죠."
황 씨는 한국 재난영화의 성격을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눴다.
"이번에 영화 '터널'에서도 약하지만 어느 정도 다뤘던 것이 '재난이 벌어졌을 때 한국 사회가 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에요. 깊게 다루지 않더라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거죠. 세월호 사건 이후 재난영화의 성격, 그러니까 재난영화를 만드는 사람, 재난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세월호를 겪으면서 재난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됐으니까요.
결국 "사고가 났을 때, 그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대처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문제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정치·국가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걸 사람들이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재난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사회 문제를 빼놓고는 다룰 수가 없게 된 겁니다. 한국에서의 재난영화는 할리우드·일본의 재난영화와는 결이 달라요. 이를 테면 정부, 국가 시스템, 관료에 대한 불신을 담는 거죠. 한국의 재난영화에서 전문가나 관료는 등장하지 않거나, (신분을 나타내는) 옷을 벗고 나오거나, 못 믿을 존재로 나오는 게 그 이유겠죠. 세월호 사건 이후에는 그것을 좀 더 정교한 방식으로, '왜 믿을 수 없나'라는 것이 다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세월호 이후의 사회적 환경 안에서 원전 문제를 다루게 될 영화 '판도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도라'가 원전 이야기를 다루게 된다면 훨씬 더 심층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겠죠. 그렇지 않고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처럼 어떤 영웅이 나타나 '다 지켰다'는 식이나, 국가의 한 관료가 순직하면서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일본 재난영화 방식으로 다룬다면 한국 관객들 입장에서는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커서 보기 힘들 겁니다. 재난영화는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데, 할리우드·일본 재난영화처럼 사건을 다뤄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없는 거죠. 그러니 훨씬 구체적으로 사회 문제를 받아 안은 상태에서 이를 다룰 수밖에 없어요. 사회 문제를 너무 깊이 있게 다루면 골치 아파서 사람들이 안 본다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어느 선까지는 깊게 다뤄줄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