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순서>
1. 우리 시대의 연극 저널리즘 / '검열언어의 정치학 : 두 개의 국민'
2. 포르노 시대 한가운데에 선 나를 보다 / '그러므로 포르노 2016'
3. 그들이 ‘안티고네’를 선택한 이유 / '안티고네 2016'
4. 주장이 구호가 안 되게 서사의 깊이 보장해야 / '해야 된다'
5. 2016년 우리는 <김일성 만세>를 볼 수 있는가 / '자유가우리를의심케하리라'
6. 불신, 이래도 안 하실 겁니까? / '불신의 힘'
7. 그는 검열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겠지 / '15분'
8.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것일까? / '광장의 왕'
9.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과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 / '이반 검열'
10. “내 정보는 이미 팔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 '삐끼ing', '금지된 장난'
11. ‘안정’이라는 질병에 대한 처방전 / '흔들리기'
12. '우리' 안에 갇힌 '우리' … 개·돼지 같구나 / '검은 열차'
13. '그때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일 / '그때 그 사람'
14. 극(極)과 극(劇) / '괴벨스 극장'
(계속)
'누군가가 말했다. 20세기는 그야말로 ‘극단(極端)의 시대’라고. 진화를 거듭한 기술합리성은 자가당착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시장의 자율적 균형이라는 신화는 가공할만한 불평등을 낳았으며, 계급혁명이라는 이상은 치환할 수 없는 차이마저 소거해버린 시대. 그게 끝이 아니다. 극단의 어느 자락에는 파시즘이 있었고, 악명으로 박제된 히틀러와 괴벨스가 있었다.
파시즘은 개인의 양심과 사상, 그리고 표현의 자유 따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오직 국가의 검열과 호령 아래서 전체가 되어버린 무채색 개인들만 존재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불순하다고 덧칠되어 학살당했다. 근대문명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파시즘은 파산했고 그 둘도 자살했다. 그렇다. 정의는 승리한다!'
라는 식의 ‘보고 싶은 결말’로, 연극 '괴벨스 극장'(이은준 연출)은 기승전결을 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상적 언설부터 인간성의 깊은 심연까지 검열하던 파시즘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을.
파시즘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괴벨스도 어느 날 땅에서 쑥 솟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극은 괴벨스의 삶을 추적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연극에 묘사된 청년 괴벨스는 소심한 성격의 ‘절름발이’(신체장애인)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심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알 수 있는 바는, 어려서부터 가정이나 학교, 교회나 사회에서 불순한 사건이 발생하면 이내 그 소년이 죄의 징표로 지목된다는 것. 그가 가진 것은 단 하나의 조그만 ‘차이’이지만, 그가 감당해야했던 것은 그만한 크기만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차별과 배제이다.
요컨대 파시즘은 ‘과거’에 국한된 ‘특이성’이 아니다. 오히려 모듈화(modular)되어 조건만 갖춰진다면 ‘오늘날’에도 충분히 키워질 수 있는 ‘보편성’이다. 혐오차별과 배제와 불평등의 삼박자는 그 조건이다. 그리 낯설지 않은 박자인데 기시감 때문은 아닐 터다. 작금의 ‘헬조선’에 ‘괴벨스 극장(劇場)’이 중첩되는 까닭이다. 괴벨스가 독일이라는 무대에서 광란극을 펼치며 외친 그 말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메아리 칠 수 있다. “한 바탕 잘 놀다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벨스 극장>은 살아 숨 쉰다. 인간성을 검열하는 파시즘이 차별과 혐오, 불평등을 먹고 자랄 수 있다는 경고로부터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책임을 떠올리게 한다. 나아가 폭력과 희생이 ‘누구’로부터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지 곱씹게 해준다. 보잘 것 없는 소감이 길어져 부끄럽다. 하여간 글의 마무리라도 짤막하게 가야지 싶다. “한국이라는 무대엔 ‘극’이 한창이다. 아, 물론 그 위에 나도 있고”
조수철 / 대학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