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의 화자인 해리는 여동생 톰과 함께 숲을 누비며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는 시골 소년이다. 지역 경관이면서도 이발과 농사를 부업으로 하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이고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아름답다. 이웃과 마을 사람들은 더 없이 따뜻하고 친근하다. 그러나 저지대에서 벌어진 흑인 여성 살인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점차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막연히 사람좋을 것만 같던 이웃들은 저녁이면 하얀 두건을 쓰고 KKK단이 되어 밉보인 흑인들을 단죄하려 하고, 냉철하고 사리분별히 확실하다고 여겼던 아버지는 한순간에 자신감을 잃고 밤마다 울거나 이성을 참지 못하고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어머니의 은밀한 젊은 시절과 그에 얽힌 추문, 그리고 아이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의 얽히고 얽힌 출생의 비밀까지. 해리는 점차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자신이 모르고 있던 세상의 참모습에 다가간다.
"아버지는 마치 우리 눈앞에서 희미하게 스러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면의 어두운 바다로 휩쓸려갔고, 거기서 허우적거리다가, 허우적거림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삶이라는 난파선에서 남은 널빤지에 몸을 싣고 표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삶은 모즈라는 이름의 암초에 충돌하여 부서져버렸다."
"나는 알던 사람들이, 혹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고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겐 과거가 있었다. 아버지가 방황하는 모습을 보았고, 한때는 어머니 역시 다른 방향이지만 방황했던 적이 있던 게 아닐까 싶었다. "
저자인 조 R. 랜스데일은 살인사건을 추적하면서 미국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뿌리깊은 인종차별에 집중한다. 흑인 여성들이 아무리 죽임당하더라도 백인만 아니면 된다는 백인사회의 편견, 빤히 드러난 살인사건임에도 희생자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연관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백인 앞에서 나체로 섰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죽임당하고, 백인 여성의 살해 용의를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조차 없이 응징당하는 당시 미국 남부 사회에 팽배한 인종차별은 시대상을 드러내는 요소이자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기까지의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백인 남자는 흑인 여자와는 상종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물론 다들 그게 거짓말인 건 알지만 당시엔 예의바른 거짓말로 여겨졌다. 여자들은 오직 아이를 갖기 위해 섹스하고 결혼 전까지 다들 순결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증오는 쉬워, 해리. 흑인이 뭘 했다거나 안 해서 이런저런 일이 벌어진 거라 말하기는 쉽지만, 인생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경관 일을 하면서 최악의 인간들을 여럿 봤고, 백인도 있었고 흑인도 있었어. 피부색은 선악과 아무 관계가 없어."
줄거리
1933년 대공황의 기운이 느린 폭풍의 기운처럼 다가드는 텍사스 동부. 13세 소년 해리는 동생과 강의 저지대를 헤매던 중 잔혹하게 훼손된 흑인 여자의 시체를 우연히 발견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희생자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역 경관인 해리의 아버지만이 홀로 사건 수사에 몰두한다. 그러던 중 백인 여성이 두 번째 희생자로 발견되자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백인들은 용의자로 지목된 흑인 남성을 재판 절차 없이 단죄하려 한다. 그러나 피부색보다 더 깊이 파묻힌 진실은 그 추악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는데...
"쳐다보니 회색 덩어리가 검은나무딸기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강물에 반사된 달빛이 얼굴에, 아니 한때는 얼굴이었겠지만 이제는 부풀고 눈은 시커먼 구멍만 남아 마치 할로윈 호박등처럼 되어버린 것을 비추었다. 그 머리에는 검은 양털처럼 머리칼이 한 뭉치 달려 있었고, 몸은 부풀고 뒤틀려 있었으며 옷은 없었다. 여자였다."
"세상은 언제든 그러하듯이 평소로 돌아갔지만, 내 눈에는 예전처럼 분명하고 깨끗하며 명료하지 않았고, 무슨 수를 써도 완전히 돌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420쪽 | 13,800원
동생은 왜 살해당했는가? 진범은 누구인가? 과연 린다의 덫에 걸릴 진실은 무엇인가?
'트랩'은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 묻어버리고 싶었던 기억을 다시 대면하게 된 린다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한편 예상치 못했던 전개를 이끌어내면서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또한 운둔에서 벗어나 소설을 쓰기 시작한 린다가 조각난 기억을 하나씩 끼워 맞추며 재구성하는 과정은 독자들로 하여금 놀라움과 함께 반전의 묘미를 선사한다.
멜라니 라베 지음 | 서지희 옮김 | 북펌 | 432쪽 | 1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