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의 인물들은 파편화돼 있다. 떠나더라도 붙들 사람이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관계라고 할 만한 감정의 교류 없이 만나다가, 연락이 끊기자 자기 자신을 찾으려 고향으로 간다(「귀향」).
「불치(不治)」의 진욱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만큼 “늘 공격적으로” 일하던 은행원이었다. 그는 대출을 받으러 온 수연과 연인이 되었다가 헤어진 뒤 역시 귀향한다.
「해명(海鳴)」의 리리는 일본인으로 대지진 트라우마가 있다. 지진을 겪은 다음부터 깊은 잠에 들 수 없었고, 오직 푹 자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자의로 떠나지 않은 경우에도 도착한 곳이 허를 찌르긴 마찬가지다.
「맹지(盲地)」에서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나’는 부품 창고가 있는 ‘건수 산업단지’로 외근을 간다. 건수는 개발이 멈춘 일종의 ‘유령도시’로, 나는 짝사랑하는 동료 지영에게 줄 마카롱 상자를 들고 불길한 도시를 배회한다.
「검은 웅덩이」에서 25년 동안 일하던 직장에서 퇴직한 정연은 한 무리의 사람들과 술을 마신 뒤 졸다 보니 지하철 막차에 갇히게 된다. 그들이 도착한 어딘가는 그들이 바라는 것을 마법처럼 이루어주는 곳이 아니다.
고향은 알아볼 수 없는 장소가 되어 있고, 이방인에게 서울 북촌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낯선 곳이다. 반 폐허 도시인 건수에서, 처음 와본 버스 종점 정류장에서, 잘못 들어선 골목길과 지하철 막차 칸에서 그들은 여전한 혼란을 맞닥뜨리게 된다.
“아,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했군요. […] 어차피 우린 다시 안 볼 사이니까 괜찮아요.”
홀로 길을 떠나는 강영숙의 소설 속 인물은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관문”처럼 만난다. 미친 여자, 점쟁이, 봉사자, 유타 주에서 온 모르몬교도, 대리기사, 아랍 여자, 할머니, 생떼 쓰는 할아버지, 목욕탕의 배구선수들, 갑자기 자라버리는 여자애들…… 여정을 떠난 사람들은 간혹 이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대개 이들은 “허락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문턱을 넘어”(「검은 웅덩이」) 말을 걸어오고, 동행하고, 영향을 미친다.
세상은 말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은 말이 아닌 말의 거품이라, 강영숙의 인물들에게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누구에게든 이해받으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다.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들어줄 이가 없다면 신에게라도 소리를 친다(「크훌」). 대화 상대를 앞에 두고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고 스스로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하는데(「폴록」), 어차피 제대로 전할 수 없다면 아예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진정한 대화 상대를 갈구하는 것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강영숙의 소설에는 생전 처음 본 이방인과 맘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어 하거나 둘만의 경험을 공유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다시 안 볼 사이”끼리의 대화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진 않는다. 이후에도 불면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에서 곯아가는 감정들을 노출하여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재난과 고난 이후, 그들이 도달하게 될 곳은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곳,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곳, 절망인지 희망인지 알 수 없는 곳, 다시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갈림길에서 만나는 것이 늘 여성이라는 점이다. 갈림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여성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할 것이다. 그간 강영숙의 소설에서 그래왔듯, '회색문헌'에서도 여성들은 길을 제시하고, 혼란스러운 누군가를 더 혼란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그 혼란에서 빠져나올 실마리를 제공한다. 타로 점을 봐주고 손금을 보는 점쟁이, 또래집단을 이끌며 길가에 쓰러진 사람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검은 군화 소녀’, 나와 닮아 있는, 어렸다가 어느새 불쑥 성장하는 여자아이들…… 여성은 몸을 바꿔가며 소설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맡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조금씩 변화하면서 기억 속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마침내 제 울음에 묻혀 들리지 않던 ‘어머니’의 울음을 듣게 된다. 그것이 강영숙의 소설로써 가능해지는 변화의 지점일 것이다.
J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르를 정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전공인 도서관학에서 들은 한 가지 개념을 빌려왔다. 최종 단행본이 되기 이전의 자료, 공식 자료 이전의 자료, 과정을 보여주는 회의 자료,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결국 폐기-폐기 도장을 찍는 일은 주로 해당 지역 인근 중학교 학생들의 방과 후 봉사활동 일감이다-하게 될 자료를 통칭하는, 회색 문헌grey literature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_「폴록」에서
책 속으로
그녀는 자신이 태어났다고 기록된 곳에 한번 와보고 싶었다. [……] 그녀는 유독 어릴 때 들었던 어떤 말 때문에 늘 힘들었다. 니 에미가 낳은 애가 죽어서 니가 태어난 거야. 사내애였어. 그건 그녀의 부모들이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자주 들었다. [……] 그녀는 늘 그 애에게 미안했고 그 애의 목숨을 빼앗아 태어난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니 그 애를 대신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다 엿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늘 우울하고 말이 없는 아버지도 그 죽은 아이를 잊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널 대신해 사는 주제에 이렇게밖에 살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_「귀향」에서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본 건 딱 두 번뿐이었어. 한 번은 뉴욕에서, 또 한 번은 일본의 어느 시골 미술관에서였어. 미술에 대단한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폴록을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폴록이라는 이름의 어감 때문에 그의 그림을 좋아했던 것 같아. [……] 미국에서 폴록을 봤을 때, 그 전시실에 들어갔을 때 폴록의 경쟁자였던 빌럼 데 쿠닝과 마크 로스코, 그리고 폴록의 그림이 한 공간에 있었어. 나는 그냥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그걸 본 것으로 내 생의 더러운, 비루한 일들을 덮자고. 아주 좋아하는 그림들이었어. 그제야 나는 알았던 것 같아. 뭐든 그냥 아주 잠깐 흘러간다는 걸. _「폴록」에서
수연은 자기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은 거실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진욱이 보고 싶다거나 헤어져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모든 게 다 무서웠다. [……] 그리고 수연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 엄마의 방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금세 그것이 재즈 가수의 스캣 송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엄마의 방문을 열었다. 한여름도 아닌데 창은 조금 열려 있었고 엄마는 어깨를 웅크린 채 재즈 가수의 스캣을 연상시키는 신음을 내고 있었다. 공포에 들린 것처럼 목젖이 떨리며 나는 소리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슬픈 소리였다. _「불치不治」에서
공터의 휠체어 탄 사람들도, 조금 가까이 있는 여고생들도, 의자에 앉은 파마머리 노인도 거대한 황사에 갇힌 불확실한 실루엣으로 보일 뿐이었다. 사실 모든 게 그랬다. 모두 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진리였다. 눈앞을 죄다 가리는 돔 하늘과 황사는 잘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건 나 자신이었다. _「맹지盲地」에서
유진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임신을 했었어요. 유전자 이상이라고 해서 지워버렸죠. [……] 그런데 가끔 이상하게도 그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게 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낳아서 고생고생하며 키웠다면 누가 내게 큰 행복을 주었을까요? 웃기는 얘기죠. 얼마 전에는 딱 그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서 있는 모습을 봤어요. 저는 열 정거장이나 그 아이를 따라갔어요. 그 아이는 행복해 보였어요. 음악에 취해서요. 아,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했군요. 저는 지하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부터 울기 시작했어요. 펑펑 울었죠. 어차피 우린 다시 안 볼 사이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_「해명海鳴」에서
돌아서서 발을 한 짝 옮기는 순간, 정연은 발목이 꺾여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정연의 얼굴은 논바닥에 붙었다. 들고 있던 가방은 저 혼자 날아가 논바닥에 처박히고 사과는 저만치 앞 논바닥 위에 떨어졌다. 정연은 뺨을 논바닥에 대고, 그 상태로, 눈을 감고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_「검은 웅덩이」에서
내가 태어난 곳에는 바다가 없다. 그곳에는 박스 공장과 가죽 가공 공장과 타이어 공장과 자전거 수리점과 숨이 막히는 분지와 고리타분한 관습과 인본주의와 악을 적당히 감춰주는 안개만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곧 바다에 다다랐다. 파란 바닷물이 발에 닿는 순간, 나는 전율했다. 바닷물보다 많은 사람들이 해안가에 서 있었다. 정유미 실장은 실크 정장을 입은 채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서서 바다를 상대로 호객 중이었다. 또 다른 정유미 실장과 박 아무개 실장과 양복과 양장을 입은 수많은 실장들이 해안가의 소나무처럼 늘어서서 우리를 따라왔다. _「가위와 풀」에서
강영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48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