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관용의 나라 네델란드, 어떻게 만들어졌나?

신간 '시시콜콜 네델란드 이야기', 영국 남자의 눈으로 본 네덜란드 이야기

레스토랑에서 계산서 금액을 인원수로 정확하게 나누는 계산법을 전 세계적으로 ‘더치페이Dutch pay’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암스테르담에도 값비싼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네덜란드인들은 과시적 소비에 얼굴을 찡그리는 경향을 보인다.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에게 팁을 주는 행동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퇴폐적인 행위로 여겨지고, 현금인출기에서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은 엄격히 제한되며, 네덜란드어로 빚schuld은 ‘죄’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릇의 머스터드나 마요네즈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쓸어 담는 데 쓰이는 긴 손잡이의 플라스틱 주걱이 탄생한 곳도 네덜란드다. - P254

세계를 떠돌다가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 불시착한 스히폴 공항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한 영국 남자는 몇 달 전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났던 한 네덜란드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친절한 그녀(킴)를 만나 저녁을 얻어먹은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그곳에 눌러 살기로 한다.

이 나라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곳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그는 제2의 고향 네덜란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나라 구석구석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배와 기차를 타고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그는 북해 부근의 노아의 방주, 카니발이 열리는 남부의 도시들, 음산한 유대인 수용소, 열기 가득한 축구장,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 미술관, 풍차 마을과 거대한 방벽을 찾아갔다.

이 여정을 통해 그가 깨달은 첫 번째 사실은 네덜란드의 역사 대부분은 물과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물을 막아내고 물을 이용하는지가 이들에게는 삶과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가 네덜란드에 만들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스페인의 오랜 지배를 벗어나 종교적 자유를 쟁취한 독립전쟁, 이후 화려하게 열린 네덜란드 제국의 ‘황금시대’와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했던 네덜란드의 전성기,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침공이 가져온 뼈아픈 현대사, 그리고 최근 이민자들이 안겨준 문제들을 살펴보며 네덜란드의 문화와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이 모든 것들이 현재의 네덜란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세히 들려준다.

여행 중에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새 국왕의 즉위식을 지켜보았고, 남부 지방의 부활절 카니발에는 호랑이 분장을 하고 같이 즐겼으며, 세계적인 레이크스 미술관에서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그림들을 감상했다. 여기서 그는 황금제국의 부유함과 거대한 부의 건설 이면에는 노예매매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음을 찾아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 방문을 통해서는, 안네 프랑크를 밀고한 사람이 실제 누구였는지,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이 유럽 그 어느 지역에서보다 더 많은 수가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씁쓸한 사실도 알게 됐다. 또한 이 나라가 왜 독일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인종차별이라고 비난받는 ‘검은 피터’의 전통을 아직도 굳건히 고수하고 있는 네덜란드인들의 이중적인 모습도 옆에서 지켜봤다.

영국인이지만 결코 축구를 좋아해본 적이 없던 저자는 네덜란드에 가서 비로소 축구장의 열기가 무엇인지를 경험했고,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직업 매춘부와는 가벼운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새벽 4시까지는 들어오라는 아빠의 말에 간섭이 심하다고 툴툴거리는 십대 소녀와, 그저 우울하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요청한 30대 여성에 대한 안락사가 실제로 시행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도대체 이 나라의 관용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가늠해보고자 노력했다.

축제 현장에서 대마초를 말고 있는 십대들을 주변 경찰이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을 목격하고 경악했던 그는 빨간 신호등이 꺼지기 전에 길을 건넜다는 죄로 그에게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더 경악했다. 자유와 관용이 넘치는 이 나라가 사실은 사소한 규제와 규칙으로 가득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네덜란드 사람들은 마약과 매춘은 허용해도 창문을 닦지 않고 지저분하게 두거나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행동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매력적이고 유머스럽고 여유로운, 때로 지나치게 간섭쟁이인 네덜란드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네덜란드의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과 교훈, 개인적인 여행담을 맛깔스럽게 버무린 이 책은 한 영국인의 눈으로 본 작지만 강한 나라, “so cool~!”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다.

책 속으로

유럽 대다수 국가들이 위기에 빠져 있었던 당시, 유럽에서 땅덩어리가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였던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를 배출했고, 로크와 볼테르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암스테르담에 운하와 타운하우스를 건설했고, 전 세계 곳곳으로 제국을 확장해나갔다. 영국 대사 윌리엄 템플이 1674년 썼던 것처럼, 네덜란드는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 이웃나라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후, 그 두려움은 거의 사라졌지만 놀라움은 고스란히 남아 이제는 미술관 벽에 걸려 있다. - P141

폭발적으로 발전한 암스테르담에는 기업가들 뿐 아니라 박해받는 이들도 모여들었다.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인과 이란인들이 뉴욕이나 런던으로 망명하듯, 세파드리 유대인(스페인, 북아프리카, 중동 출신의 유대인 - 편집자 주)이나 프랑스계 위그노 교도들은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땅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피신했다. 당시 이런 피난민들은 부를 찾아 도시로 떠난 네덜란드의 농민 자리를 채웠고, 1580년~1620년 사이 지역 인구는 세 배 이상 폭증했다. 포르투갈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한 부모님을 따라온 스피노자를 비롯, 저명한 사상가와 과학자도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 그의 저서, 《이성理性을 올바르게 이끌어, 여러 가지 학문에서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 즉 《방법서설》을 출간한 곳도 암스테르담이었다. 그는 “어떤 나라에서 이렇게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걱정 없이 잠잘 수 있느냐”고 말하며 암스테르담을 칭송했다. - P179

1637년, 아프리카의 가나에 도착한 네덜란드 함대는 포르투갈의 주요 노예 매매 기지였던 엘미나 성을 탈취했다. 그로부터 약 10년동안 네덜란드는 서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더욱 견고한 노예기지를 세우거나 다른 나라로부터 빼앗았고, 대서양 건너편에도 비슷한 중계 기지를 만들었다. 필요한 시설이 모두 마련되자, 본격적인 노예 매매가 시작되었다. 역사학자 J. W. 슐트 노드홀트에 따르면 12년 동안 네덜란드는 엘미나와 루안다에서만 약 2만3천 명의 노예를 송출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정보에 따르면 약 10년간 아프리카에서 약 2만5천 명의 노예가 손발을 쇠사슬로 묶인 채 브라질로 송출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총기와 병기, 기타 공산품을 수출하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노예를 수출하고, 노예가 생산한 설탕이나 담배, 럼주 등 제품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다시 유럽으로 수출하는 유명한 ‘삼각무역’의 주체가 되었다. 노예 매매를 하는 나라에게 흑인은 단순히 사고팔 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다. 역사학자, 리처드 오루세이 아사오루는 암스테르담을 ‘노예제도에 관한 한 유럽의 수도’라 불렀다. - P187

유럽의 여느 나라에게 다 그렇듯, 네덜란드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나치는 작은 나라 네덜란드에 침입해 폭격을 퍼붓고 끝내는 점령하고야 말았고 네덜란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나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이 네덜란드에 가져온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전체 인구 대비 전쟁으로 사망한 네덜란드 인구의 비율은 영국이나 프랑스, 벨기에보다 훨씬 높았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식민지(현재 인도네시아)에서만 약 4백 만 이상의 인구가 일본의 점령 아래 사망했다. 이 야만적인 전쟁 중에서도 최악으로 야만적이었던 홀로코스트가 가장 심하게 벌어졌던 한 곳이 네덜란드에 위치해,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의 유대인보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P203

한 번은 교외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14살 혹은 15살 쯤 되었을 여자 아이 하나가 너무 엄격한 아빠가 정한 통금시간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빠가 나더러 새벽 4시까지는 집에 들어오래!”
나는 잠깐 짬을 내어 앉아 공책에 ‘미친 것 같은 네덜란드의 자유주의 정책’의 예를 써내려갔는데 곧 쓸 공간이 부족해서 더 쓰기를 그만둬야 했다. 네덜란드에서 대마초는 커피만큼이나 사기 쉬웠고, 누드 해수욕장은 옷을 입어야 하는 해수욕장만큼이나 흔했다. 불치병에 걸렸다면 아이에게도 안락사가 허용되었으며, 속도 내어 달리는 오토바이 운전자는 헬멧을 쓰지 않아도 됐다. 매춘부는 병가를 낼 수 있었고, 포주는 정부에 근로소득세를 감면해달라고 로비했다.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과 입양이 합법화된 것은 이미 10년이 넘었고, 전 국민 중 95퍼센트가 총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네덜란드 전국의 경찰 수는 뉴욕시의 경찰 수와 비슷할 정도로 적었고, 2009년 네덜란드 법무부는 네덜란드 교도소가 일부 벨기에 수감자들을 수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도소를 다 채울 만큼의 범죄자가 없어 곧 몇 군데를 폐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군인은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고, 얼마 되지 않는 교도소 수감자에게는 죽은 가족과의 만남을 도와주는 점술사의 방문이 허용되었다. 이런 예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스스로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나도 주춤하게 만드는 헤드라인 뉴스가 들릴 때도 많았다. 서른다섯 살의 여성이 단지 우울하다는 이유만으로 안락사를 요청했고 그것이 합법적으로 시행되었다거나, 소아성애자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 성관계 승낙 연령을 열두 살로 낮추자는 운동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소식은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내 네덜란드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 P372

네덜란드인은 사생활이나 고독을 존중하지 않아, 공공장소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 공원에 자리 잡고 앉으면 항상 몇 분도 안 되어 누군가 나타나 넓고 텅 빈 잔디를 놔두고도 바로 내 옆에 앉았다. 기차를 타고 이동 중에 노트북으로 일할 때면 낯선 이가 내 어깨 너머로 노트북 화면을 보고 큰 소리로 개선책을 제안하거나 내가 작성하던 문서의 틀린 곳을 찾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기차에서 밀봉한 도시락을 꺼내면 사람들은 어깨를 두드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물었다. 정숙 객차로 지정된 기차 칸은 창피한 개인사를 크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로 여겨졌다. 내 친구 하나는 길을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로 결혼식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낯선 사람이 친구를 불러 세우더니 지금 주문한 그 꽃 말고 다른 꽃을 주문해야 한다고 훈수를 두었다고 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나 내성적인 네덜란드인은 통 없는 것 같았다. 네덜란드인에게 비밀이란 없었다. 베이크드 빈조차 금속 깡통이 아니라 투명한 유리통에 넣어 판매되니 말 다했다. -P381

직장을 가지고 있는 내 친구들도 보면 그다지 일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평균적으로 네덜란드인의 근무시간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인 1주일에 27시간 미만으로, 네덜란드인은 영국인에 비해 하루 1시간 이상을 적게 일했다. 또한 성인 중 50퍼센트 이상이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한다. 나는 1주일에 32시간 근무하며 한 달 월급을 제대로 받는 사람도 여럿 알고 있었다. 실제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서, 사람들은 내가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5일 일하는 정규직이라고 말하면 깜짝 놀란다. “그럼 취미 생활은 언제 하나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아르바이트생은 놀란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물었다. - P385

벤 코츠 지음 | 임소연 옮김 | 미래의창 | 432쪽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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