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들어 부쩍 말수가 줄어든 지효(가명·여)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효는 학폭위의 결정에 따라 같은반 학생 네 명에게 사과 편지를 써야만 한다. 그 학생들은 지효의 학교생활을 지옥으로 만든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이다.
가해 학생들은 2~3명씩 짝을 지어 지효의 등이나 머리를 수시로 때렸다.
지효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찾아와서 뺨을 수차례 때리기도 했다"며 "학교 가는 게 무섭고 두려웠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효가 함께 사는 이모 유모(44) 씨에게 입을 열면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A 초등학교는 학폭위를 열어 가해학생들에게 서면 사과와 교내 봉사활동 150분, 특별교육 2시간 이수를 결정했다.
◇ '우리 애만 못 당한다'?…적반하장 가해 부모
학폭위의 교치(敎置) 결정 후에도 가해 학생과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한 지효 가족들은 결국 가해 학생들을 서울 관악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은 가해학생들의 폭행 등 일부 괴롭힌 사실을 인정해 사건을 서울가정법원에 넘겼다.
하지만 얼마 뒤 유 씨는 학교로부터 지효가 가해학생 신분으로 학폭위가 열린다는 통보를 받았다. 피해학생은 지효를 괴롭혔던 가해학생 네 명이었다.
학폭위 개최 이유는 지효가 가해학생들에게 3~4차례 욕설을 했다는 것.
결국 지효의 욕설 행위는 인정됐고, 지효의 서면 사과가 결정됐다.
지효의 변호사 삼촌이 학폭위에 참여해 "가해 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을 당시에 한 소극적인 저항이다. 이런 저항조차 인정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어떤 일을 당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교훈밖에 남길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교 측은 "네 명의 학생이 지효에게서 욕설을 들었다는 피해사실이 확인돼 절차에 따라 교치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 지효 가족의 작은 바람은 "진심어린 사과"
지효와 가족들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별것 아닌 일 가지고 큰일을 만들었다'는 주변 분위기.
유 씨는 "지효는 괴롭힘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는데, 학교나 가해 부모들은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 같다"며 "아직까지 가해학생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가해 학생과 부모들이 사과의 뜻을 전하고 지효의 마음에서 이번 문제를 바라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지효 가족은 학폭위 결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한 법적 대응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여성청소년과 소속 경찰관은 "과거 '친구들 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식의 시각이 학교폭력을 방치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관련 법이 여러차례 개정됐다"며 "이제는 철저하게 피해자 시각에서 사안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앞서 지난달 30일 한 매체는 4년 전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A(16) 군의 사건을 보도했다.
당시에도 학폭위가 열렸지만, 가해학생 9명 중 3명에게만 교내 봉사활동 등 가벼운 처분만 내려졌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학폭위의 안일한 대처가 논란이 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