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레오나르도 샤샤
이탈리아 작가 레오나르도 샤샤의 소설 '이집트 평의회·기사와 죽음'이 출간되었다. 일생 동안 존재하는 모든 불의에 저항했던 샤샤의 소설 가운데 초기와 후기를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문제작 두 편을 한 권에 모았다.
샤샤의 두 소설―18세기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를 뒤흔든 최악의 역사 왜곡 고문서 조작 스캔들 '이집트 평의회', 살해당한 변호사와 유령 테러 집단의 배후에 도사린 여론 조작 음모 '기사와 죽음'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을 넘어 지금의 우리의 현실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샤샤는 파시즘이 득세하던 시절의 마피아 본거지 시칠리아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이즈음 프랑스 계몽주의와 미국 문학, 반파시즘을 접한 후 범죄와 정의가 때때로 서로의 모습으로 위장하는 시칠리아의 어두운 삶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는 부패한 권력 앞에서, 억압자의 동조자이기를 단호히 거부한 채 펜을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검이라 여기고 수많은 작품으로써 투쟁한다. 그는 소외된 약자들의 굶주림, 사적으로 자행되던 물리적 폭력, 이를 간과하는 사법 횡포라는 시칠리아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며 궁극적으로는 사회 구성원이 억압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 권리를 획득하려는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집트 평의회'
샤샤의 초기 작품 '이집트 평의회Il Consiglio d’Egitto'(1963)는 실제 역사 기록물들을 다시 옮겨 쓴 역사소설이다.
1782년 12월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을 해체시키기 위해 봉건제도와 교회를 개혁하려는 총독 카라촐로는 사사건건 그들과 대립각을 세운다.
소설 '이집트 평의회'는 나폴리 왕국에 파견되었던 모로코 대사가 시칠리아 해안에 난파하면서 시작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대사를 위해 총독은 근방에서 유일하게 아랍어를 할 수 있다는 몰타 출신의 주세페 벨라를 불러 오는데, 그는 미사 집전 ‘신부’이자 꿈 해몽으로 복권 숫자를 알아맞히는 ‘숫자꾼’을 병행하는 인물이다. 변변찮은 처지의 벨라는 대사를 따라다니면서 항상 꿈꿔 온 안락하고 부유한 삶이 현실이 되는 기쁨을 누린다.
그리고 벨라를 이용하여, 시칠리아 역사에 지대한 열정을 가진 고위 성직자 몬시뇰 아이롤디는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던 아랍 고서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벨라, 이제 그는 이 아랍 고서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기를 획책한다.
시칠리아와 전혀 상관없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삶에 대한 기록은 벨라의 손길이 스치며 대단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시칠리아 평의회'로 둔갑한다. 밑바닥 인생에서 역사를 복원하는 중요 인사로 신분 상승을 이룬 벨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시칠리아의 과거를 창조해 내기에 이른다. 새로운 고서 '이집트 평의회'의 발견에 귀족들은 대대손손 누려 온 자신들의 특권을 공고히 하는 근거가 되리라 기대하지만, 벨라는 자신의 번역이 그들의 질서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이미 깨달았다. 현재 귀족들이 소유한 봉토와 지위가 과거 왕권 침해의 결과라는 소문이 돌고, '이집트 평의회'의 번역이 완성되기 전에 귀족들은 마땅히 그러해야 할 가문의 역사를 위해 경쟁적으로 벨라의 환심을 사서 결과물을 조작하도록 애쓴다. 이 과정에서 벨라는 막대한 부를 쌓음과 동시에 수도원장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한편 소설 '이집트 평의회'의 또 다른 주인공인 변호사 프란체스코 파올로 디블라시는 10년 후 벨라의 몰락과 평행하여 비로소 부각되는데, 이성의 대표자이고 진취적인 자코뱅당의 추종자이며 평등사상의 열렬한 후원자이다. 성공한 프랑스 혁명에 고무된 그는 시칠리아 공화국을 꿈꾸면서 혁명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샤샤는 실제 사건이나 사회현상을 재해석하여 거의 그대로 작품 속에 옮기는 글쓰기를 했다. 그렇게 다시 쓰인 소설은 간과할 수 없는 위중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벨라의 사기죄와 디블라시의 국가내란죄―샤샤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범죄를 시대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 두 인물은 탐욕, 무지, 최대 권력에 대한 혁신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기사와 죽음'
샤샤는 후기 작품 '기사와 죽음Il cavaliere e la morte'(1988) 속 세 건의 살인을 통해 이처럼 부패한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고발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Ritter, Tod und Teufel'로부터 제목을 따온 이 형이상학적 범죄소설에서 악마가 빠진 것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악마의 유혹이 없어도 악을 너무나도 쉽게 자행하기 때문에 악마가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1989년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경찰서. 한 남자가 뒤러의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를 보고 있다. 그는 뒤러가 그림 속의 기사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인물이 누구인지 떠올리려고 애쓴다.
남자는 이 경찰서의 부서장 비체로, 그날 아침 서장 카포와 함께 산도츠 변호사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연합산업 프레지던트 아우리스파를 방문한다. 죽어 있는 산도츠의 호주머니에서 만찬장에서 쓰이는 아우리스파의 지정석용 이름표가 발견되었고, 그 이름표 뒤에는 ‘나는 너를 죽일 거야’라고 아우리스파의 글씨체로 적혀 있었던 것. 이에 대해 아우리스파는 장난이었으며, 산도츠가 살해당하던 저녁에 ‘89년의 아들들’이라는 테러 집단의 협박 전화를 받았다고 증언한다. 이때 산도츠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사실이지만, 통화 내용 자체의 진실 여부는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비체는 간과하지 않는다.
경찰 조직 내에도 복종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재계의 유력 인사―아우리스파가 비밀스럽게 털어놓았던 ‘89년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순간 언론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이어 자신이 ‘89년의 아들들’이라며 산도츠를 살해했다고 밝히는 전화들이 걸려 온다. 거물급 인물이 혐의를 받는 상황을 피하려는 카포는 이러한 익명의 전화들을 증거로 보고 ‘89년의 아들들’에게 죄를 물어 수사를 진행하고, 반면에 비체는 ‘89년의 아들들’의 실체를 의심한다. 대외적으로는 친구 사이이나 실제로는 원수지간에 가까웠던 아우리스파와 산도츠에 대한 단서를 확보한 그는 ‘89년의 아들들’을 유령 테러 집단이라 간주하는 한편으로 유령 테러 집단의 존재를 경찰이 인정하면 결국 유령 테러 집단의 이름하에 또 다른 범죄가 벌어질 수 있음을 염려한다.
그리고 이제 경찰은 산도츠 변호사의 살인범이 아니라 테러 집단 ‘89년의 아들들’을 뒤쫓게 된다.
'기사와 죽음'에는 샤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일견 간단해 보이나 실제로는 복잡다단하며 수많은 암시로 가득한 그만의 패러디가 있다. 뒤러의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로부터 그는 정의를 추구하다 순교하듯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을 기사로, 세상의 악을 만들어 내는 파괴적이고 부패한 권력은 악마, 곧 죽음으로 패러디 한다. 정형화된 기사와 죽음이라는 개념에 의해 확보된 가치를 문학성으로 재활용함으로써 샤샤 특유의 지성과 아이러니를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그가 실제로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며 써 내려간 이 소설에는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던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그의 두려움과 감정, 욕망이 숨김없이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적인 작가의 모습은 마찬가지로 폐암에 걸려 사망 선고를 받은 주인공 비체에게 고스란히 투영된다. 샤샤는 자신의 생이 스러져 가는 순간에조차 이탈리아 전체를 뒤덮고 있던 암과 같이 파괴적이고 부패한 권력을 고발하는 소설을 완성했다.
책 속으로
[…] 강력한 거짓에 직면한 정직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무능력과 반감을, 혼란스러운 죄가 드러나는 대신에 절망적인 무죄가 물러서는 것을 들었다. ‘거짓은 진실보다 훨씬 더 강하다. 삶보다도 더 강하다. 거짓은 존재의 뿌리에 박혀 있다. 거짓은 생명 너머에 있는 태초의 원시림에 숨어 있다.’ 어둡고 꺼칠꺼칠한 나무가 길게 늘어선 산마르티노의 길은 더욱 어두운 거짓의 잎을 뻗치고 있었다. ‘뿌리, 잎!’ 그는 종종 혐오스럽게 이미지를 떠올리며 깜짝 놀란다. ‘아이는 숨 쉬듯 거짓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을 믿는다. 그리고 결국, 예수회 신부들이 말하는 야생을 믿는다. 우리는 진실은 역사보다 우선한다고, 역사는 거짓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거짓으로부터 사람을 사면시키는 역사는 개개인을, 사람들을 진실로 이끈다……’ […]
_「이집트 평의회」 제3부 7, 171~172쪽
“사실,” 디블라시 변호사가 말했다. “모든 사회가 사기 유형을 만들어 내죠, 말하자면 사회에 맞추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자체가 사기죠, 법적 사기, 문학적 사기, 인간적…… 그래요 인간적이죠. 심지어 존재에 대한 거라고 말씀드리겠어요…… 우리 사회는 물론, 당연히 정반대되는 사기를 만들어 내진 않았지요……”
_「이집트 평의회」 제3부 9, 180쪽
[…] ‘상상하는 것만이 아름답다. 그리고 상상은 기억이기도 하다…… 몰타는 가난하고 씁쓸한 땅에 불과하다, 산파올로가 도착했을 때처럼 사람들은 야만적이다. 그저 바다에서 이슬람 세상의 우화와 그리스도교 세상의 우화를 상상으로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역사라고 말할 테지만, 나는 우화라고 말한다.’
_「이집트 평의회」 제3부 15, 236~237쪽」
“그런데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89년의 아들들이 지금 생겨나고 있는 중이라는 거죠. 허언증 때문에, 지루함 때문에 아니면 적어도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르려는 작자들 때문에요. 라디오, 텔레비전 및 신문에서 이 소식을 떠들어 대기 1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산도츠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도록 시킨 사람의 계산으로 만들어졌어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결과를 정확하게 계산하면서 말이죠. 아니 어쩌면 어느 멍청이가 사실이 아닌 89년의 아들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맞장구칠 최대 효과도 계산했겠네요.”
_「기사와 죽음」 307쪽」
[…]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모든 일이 인플레이션 현상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다. 삶의 통화가치는 매일 떨어졌다. 온전한 삶은 더 이상 그 어떤 구매력도 없는 일종의 공허한 행복감이라는 통화가치를 지녔다. 생각 및 감정의 대비는 쓸모없었다. 참된 것은 이미 도달할 수 없는, 심지어 알 수 없는 미지의 가격을 지녔다.
_「기사와 죽음」 355쪽」
레오나르도 샤샤 지음 | 주효숙 옮김 | 현대문학 |380쪽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