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복음서 19장에 등장하는 키 작은 세관장 자캐오는 돌무과나무에 올라 예리코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은 뜻밖에도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신다. 자캐오는 당시 관습에서 보면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세리였고, 군중은 예수가 죄인과 다름없는 이와 어울린다고 수군거렸다. 예수에게 호기심은 있지만 군중을 헤치고 나아갈 정도로 열정적이지는 않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싫어 멀찍이서 예수를 바라본 자캐오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저자가 말을 건네고자 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 안의 자캐오다. 신앙에 호기심은 있지만 선뜻 그 안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 사람,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의심하는 사람, 예수를 둘러싼 군중처럼 열정적인 사람들에게 반감을 느끼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신앙인이다.
저자는 책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나는 무신론자들에게 동의할 때가 많다. 단 하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믿음만 빼고는 종종 거의 모든 점에 동의한다. 오늘날 온갖 종교 상품들로 북적대는 시장에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서도 때로 회의론자나 무신론자, 불가지론적 종교 비평가에게 심정적으로 가까움을 느낀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없다는 느낌을 무신론자들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부재감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성급한 조바심의 표출이라고 본다. 나도 간혹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멀리 동떨어져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짓눌릴 때가 있다. 세상과 인생의 수많은 모순이 지닌 양면성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 같은 말마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이 체험도 달리 해석하고 '하느님의 부재'에 달리 접근할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한 서로 깊이 관련된 세 가지 인내가 있다. 이들은 각각 믿음·희망·사랑이라 불린다."
저자는 신앙과 무신론의 가장 큰 차이는 '인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신은 죽었다'고 '신은 아무 소용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품은 의심과 신의 부재에 대한 확신에 공감한다. 하지만 신비이신 하느님은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신비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 시간을 옛 성인들은 '어두운 밤', '구름 덮인 산', '무지의 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와 죽음의 순간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음이 분명한 성녀 리지외의 데레사의 믿음과 부인을 살펴보며, 그 의심이야말로 열정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는 반증임을 밝힌다.
믿지 않는 이들뿐 아니라 '확고하게 믿는 이들'도 있다. 그 확고한 믿음 때문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쟁과 살상이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불신앙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이 확신인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인 확신이 정말 신앙일까? 이 책에서는 그 확신으로 일어나는 전쟁과 테러의 이면 또한 살펴본다. 우리가 그 전쟁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 주며,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귀띔해 준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 시간을 어떻게 인내하며 보내느냐에 따라 그 열매의 풍요로움이 달라질 것이다. 자신이 신앙인인지 아닌지 고민해 본 사람, 그리스도교에 관심은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망설여지는 사람, 타인의 확고한 신앙에 호기심 혹은 반감이 들어 본 사람,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삿대질을 해 본 사람, 하느님을 없다고 종교에 등을 돌린 사람, 종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책 속으로
하느님의 부재만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을 절실히 요구하게 하는 것도 없다. 이 체험은 '하느님을 원망하고' 결국에는 신앙을 저버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여러 다른 길이 있으며, 특히 신비주의 전통 안에는 더 풍부하게 들어 있다. '하느님 없는 세상'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고는 종교적 추구의 의미,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일’과 그 세 얼굴인 믿음·희망·사랑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
모름지기 성숙한 신앙이란, '신의 죽음' 또는 그보다 좀 덜 비극적으로는 신의 침묵이라고 일컫는 체험을 자기 안에 녹여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그런 체험은 내적 성찰을 통해, 피상적이거나 안이한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체험하고 극복해야 한다. 무신론자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인내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들의 진리는 불완전한 진리라는 말이다.(14쪽)
자캐오가 고질적인 개인주의자나 '아웃사이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열광의 무리에, 또는 분노의 무리에 줄을 서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돌무화과나무 가지 속에 은신처를 찾는다. 교만해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절대적 기준과 요구 조건에 견주어 한없이 부족한 자신의 '작은 키'와 큰 결함,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름을 불러준다면' 자신의 사생활과 집착을 버릴 수 있고 기꺼이 버리려 한다. 그는 덥석 그 절대적 도전을 받아들고 자기 삶을 바꿀 것이다. 그러나 돌무화과나무 가지에 숨어 있는 이들에게 낯설거나 이질적이지 않은 사람,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 그들을 염려하는 사람, 그들 마음과 정신에 일어나는 일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캐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자캐오가 있다. 우리 세계, 우리 교회, 우리 사회의 운명은 이 자캐오들을 얼마나 얻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다.(24쪽)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을 선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신학 분야인 신정론神正論의 영역에 속하는 물음들은 사실 매우 어렵다. …수많은 고전 신학 이론도 이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에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신론이 그 대답을 주는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면 이 모든 문제가 우리에게 더 분명해지고, 우리가 악과 고통의 문제에 더 잘 직면할 수 있게 되는가? 세상은 정답이 없고 역설로 가득하다. 여러 대안적 설명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우리가 책임 있게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이것을, 나는 저것을 선택했을 뿐인데 당신과 무슨 논의가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도발적인 종교 비평가들을 좋아한다. 예컨대,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번뜩이고 신앙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을 자극하는 니체가 그러하다. 나는 신앙과 비신앙 사이의 문제들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보여 주면서 신앙이 무기력한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이들을 좋아한다.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신비의 깊은 골에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면 즐겁다.(126쪽)
그런가 하면 마법 같은 하느님이라는 유아적 개념을 오래도록 고수해 온 이들도 있다. 뻔한 위로와 얄팍한 낙관을 제시하는 신, 우리에게 봉사하는 '수호천사', 늘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고 말해 주는 위로자, 우리가 비는 어리석은 소원들을 어김없이 들어주는 '심부름'만 하면 되는 가정 수호신으로 여기는 것이다. 작고 아늑한 방 같은 그런 신들은 삶에 심각한 위기들이 닥쳐오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런 신에게서 벗어난 이들이 마침내 '현실 세계'에 관한 진리를 알게 된 것을 뿌듯해하며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선언한다. 그들은 '하느님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이라는 무대 뒤에 숨은 위대한 협력자의 그늘 아래 무한 권능에 대한 유아적 갈망을 이런 식으로 투사하는 것은 우상이며, 이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비로소 살아 계신 하느님, 아브라함의 순례하는 신앙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대기실에 들어섰음을 깨달은 것을 축하해 줄 그리스도인이나 유다인, 무슬림을 만난 적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132쪽)
토마시 할리크 지음 | 최문희 옮김 | 분도출판사 | 264쪽 |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