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삶의 유형에는 그것을 대표하는 동서양 각각 한 명씩의 인문학자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여행하는 삶의 유형에는 동양의 사마천과 서양의 괴테를 나란히 배치한다. 여행이 곧 삶과 지식의 기반이 되었던 두 사람이었기에 사마천과 괴테는 여행하는 삶의 유형을 대표하는 자로서 현재의 우리 앞에 선다. 이렇게 동서양 14인의 삶을 어떤 유형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것은, 그 틀이 우리가 원했던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동시에 설명하는 하나의 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의도하는 것은 삶의 태도가 곧 사상을 결정했던 어떤 이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삶의 태도와 그들이 만난 문제, 또 그들이 그 문제를 극복한 방식을 살펴보며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 고난을 뚫고 성공에 이르렀는지가 아니라, 어떤 문제에 놓여 있었고 어떤 전환을 만났으며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 책에서 14인의 생애를 서술하는 것도,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을 사상가의 핵심적 사상을 길게 정리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선택과 지향을 이해해 보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정보들은 사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를 밖에서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나라면 어떤 고난과 선택의 기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지, 어떤 길을 따라갔을지를 생각하고 그들의 삶으로 내 선택을 비추어 보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 지나간 이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의 현재와 지나왔던 길, 그리고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길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여, 궁극적으로는 견디기 힘든 이 세상에서 내가 단단해지는 방법을 찾아내는 여정이 이 책이 정의하는 '공부'다.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지나온 이들의 삶을 알아가는 것도, 그들이 남긴 사상을 익히고 사상집의 목록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 대한 일차적 공부를 통해 내 삶을 비추어 보면서 내가 나로서 세상에 제대로 오롯이 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문학 책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고 우리가 인문학을 활용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은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묵묵히 삶을 견디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 바로 '나를 공부할 시간'이다.
'앎을 좇는 삶'은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와 19세기 조선의 학자 이규경이 대표한다. 모진 가난과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20여 년의 시간 동안 백과전서 완성에 삶을 바치고 틈틈이 저술 작업을 해 나갔던 디드로, 그는 편견, 전통, 역사, 권위 등에 맞서 그때까지 쌓인 모든 사상적 자원을 체계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는 철학자, 이의를 제기하는 철학자로 우뚝 선다. 가난과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궁벽한 벽지에서 끝없이 지식을 추구하고 책을 읽었던, 그리하여 당대에는 물론 현대까지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학자 이규경은 평생 쌓아 온 지식을 말년에 일련의 체계에 따라 하나의 백과전서로 완성하였다. 18세기 서양의 디드로와 19세기 동양의 작은 나라 이규경이 하나의 삶의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로 묶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지식에 대한 열정 하나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 평생의 시간을 헌신하며 책을 읽고 자료를 모으고 분류해 나갔기 때문이다. 이들을 이끄는 힘은 지식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미래의 어느 때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지식을 완성하고자 하는 순박함이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모든 지식의 과다함은 어쩌면 이런 순박한 열정의 열매일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브루노와 19세기 조선에서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꿈에 이끌린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꿈에 이끌렸다는 사실 외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꿈에 이끌렸고, 그 꿈의 계시에 따라 참된 진리와 가치, 올바른 세계의 구상을 찾아 세상을 떠돌았으며, 평생 소멸하지 않은 한순간 꿈의 대가로 이탈을 이단으로 단죄하는 권력의 중심에 사로잡혀 형장에서 산화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꿈에서 본 어떤 극단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현재의 자기를 버리는 사상적 모험과 전환을 시작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꿈이 거대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꿈에 삶의 값을 모두 치르려는 무모하면서도 과감한 정신, 그리고 용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씩 달라져 왔음을 그들의 삶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가족과 친구들이 아니라 더 많은 민중을 위해 세상을 바꾸고자 목숨을 던진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변혁하는 삶'의 대표자로 등장한다. 외로움과 주변에 대한 무정함으로 무장한 채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이들의 숭고한 선택 앞에 우리는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기보다 나를 넘어서는 사랑의 힘을 느끼게 된다.
일생을 궁벽한 벽지에서 세상과 고립된 채 살아갔던 스피노자와 정약용은 어떠한가. 이들은 자신을 파문하고 유배시킨 세상을 원망하는 데 시간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평생을 시대를 넘어서는 철학 세계를 기획하는 데 바쳤고, 이들이 남긴 사상은 지금까지도 기억된다. 이들은 ‘유배당한 삶’을 살았으나 세상은 그들의 학문적 성취까지는 유배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유배당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성 있는 삶은 언젠가는, 어디에선가는 열린다는 것을,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진정성에 대해 질문해 가며 단단해지는 과정과 시간의 경과를 조급해하지 않는 여유라는 것을 일깨운다.
철학의 주체를 '나'가 아닌 '너', 즉 타인으로 돌린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는 '공감하는 삶'의 유형으로 만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내 삶과 철학의 중심에 두었던 이들의 선택, 그 선택은 우리에게 철학의 기반은 뛰어난 지식도 엄청난 박식도 아닌 공감과 이해임을 말해 준다. 더불어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마음과 행동은 내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도 알게 한다.
스스로 삶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읽고 쓰는 삶'을 선택하고 지향했던 이들이 있다. 르네상스 최초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와 주자학을 완성시킨 12세기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 주희다. 중요한 건 이들의 읽고 쓰기는 사회적 성취나 성공이라는 현재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의 변화를 기대하면서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다 해서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의 읽고 쓰는 삶은 읽고 쓰는 것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묵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세였다. 그 길이 험난하고 모진 시련을 동반한 것이어도 주어진 삶이기에 운명처럼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던 두 사람. 그들의 ‘읽고 쓰기’는 자기와 세계에 대한 멈추지 않는 실천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은 이런 일곱 개의 유형으로 닫힐 수 없고 닫혀서도 안 된다. 이 책에 담긴 일곱 개의 유형은 내가 택한 삶의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택하지 못한 여러 삶들 중 극히 일부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간 길에도 내가 있지만 가지 않은 길에도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일 테다. 결과로서 보이는 이들 14인의 삶의 유형 안에는 그들이 그렇게 가지 않았을 수도 있는 수많은 길의 흔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결과물로 남긴 저작물이나 성취가 아니라 그것을 완성해 나간 그들의 삶 자체다. 지금 당장 효과를 내고 타인의 존경을 얻는 일이 아니더라도 소박한 일을 매일 묵묵히 해 나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들의 선택은 드러나는 것만이 빛나는 것이 아님을, 지금 빛나지 않아도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조용히 일깨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을 견딜 만한 힘을 얻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일을 대체 내가 왜 하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인가, 왜 나는 이렇게밖에 선택하지 못했는가. 지금을 회의하고 지금의 나를 의심하는 이 수많은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이들 14인의 인문학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들이 택한 삶, 그들이 택한 길, 그들이 버린 이익, 그들이 놓친 많은 것들이 의심하는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차분하게 속삭인다. 지금 당신의 그 삶은 보편적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을지라도, 당신 자신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렇기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 그 누가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지 않더라도 그것 자체로 살아갈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들 삶의 유형을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나와 일치시키면서 위안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다. 한 가지 유형을 상징하는 삶의 대표로서 우리가 그들을 칭할 때, 그들의 삶은 너무도 치열하고 절실한 선택과 그에 따른 절박한 책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진실성을 나 혹은 나의 삶과 비슷한 성향이라는 이유로 이으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나를 공부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진실했고 절실했던 그들의 삶을 내 삶의 나태함을 질책하는 준엄한 채찍으로 경건하게 활용한다는 말일 것이다.
책 속으로
물론 브루노도 최제우도 어느 날의 신비한 꿈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의 깨달음을 밀고 나갔을 것이고 그래서 낯선 생각을 경계하는 낡은 시대의 제물로 희생당했을지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꾼 꿈은, 그들을 인도한 꿈은 적어도 그들의 깨달음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꿈에서 본 어떤 극단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현재의 자기를 버리는 사상적 모험과 전환을 시작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111-112쪽)
스피노자도 정약용도, 현재에 실현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사상아 담길 만한, 기획하고 구상한 세계가 실현될 날이 올 것을 믿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철학자도 이야기꾼도 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나 자신일 수도 있는, 시대와 불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철학적 구상도, 환상적인 이야기도,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정신도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이 불화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183쪽)
성호와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타인이 나의 잉여가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들이 단지 나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나를 나이게 하는 또 다른 나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을 두고 나는 무관심과 자기중심성을 거두고 타자 앞에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물론 우리 중의 누군가는 성호나 레비나스가 제안하는 통찰과 관계없이 본성의 차원에서 이를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알려 주지 않아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216쪽)
김선희 지음 | 풀빛 | 256쪽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