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서서 생맥주 마시던 시절, 기억나시나요?"

창비 1950~80년대 <한국 현대 생활문화사> 출간

- 50년대 '삐라'부터 80년대 '양념통닭'까지
- 국가 통제 저항해 '미니스커트' 입던 시절
- 정치에서 벗어나 우리 삶 파고든 '생활문화사' 서술
- 먹고 사는 것이 곧 역사…성찰하는 계기 됐으면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9월 1일 (목)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홍석률 교수 (성신여대)


◇ 정관용> 보통 역사서 하면 정치 변화를 쭉 기술하는 그런 책을 떠올리게 되죠.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생활문화의 변화 아니겠습니까? 우리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생활의 여러 측면, 영화, 스포츠, 음식, 문화 이런 것들을 전부 고려해서 새롭게 역사책이 나왔습니다. ‘한국 현대 생활문화사’. 10년씩 끊어서 4권으로 한꺼번에 출판이 됐네요. 이 작업의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성신여대 홍석률 교수 모시고 좀 이야기 듣겠습니다.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 홍석률> 네.

◇ 정관용> 기획과 집필에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셨더라고요.

◆ 홍석률> 네. 여기 참여한 필자는 32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 학기 사정으로 봤을 적에 이렇게 많은 학자들이 하나의 계획에 참가하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죠.

◇ 정관용> 역사학자도 있고 사회학자도 있고.

◆ 홍석률> 네, 다양합니다. 문학전공자도 있고 지리학자도 있고 대중예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 정관용>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이 기획이?

◆ 홍석률> 한 3년 전이었는데요.

◇ 정관용> 3년 전.

◆ 홍석률> 그래서 한국현대사를 생활문화사 중심으로 한 번 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이 책을 또 만들게 된 중요한 이유는 한국현대사 특히 해방 이후에 1945년 이후에 한국현대사는 주로 지도자 공과논쟁을 중심으로 얘기되다 보니까.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 (사진=시사자키 제작팀)

◇ 정관용> 대통령 평가 식으로.

◆ 홍석률> 그렇죠. 그런데 역사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는데 물론 지도자 문제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좀 더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얘기하는 게 필요한데 그러한 것을 한 번 해보자.

◇ 정관용> 제가 이 책을 앞에 보니까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4권인데 책의 부제가 너무 재밌어요. 50년대는 ‘삐라 죽고 댄스홀 가고’ 이게 무슨 상징성이 있나요?

◆ 홍석률> (웃음) 삐라라고 하는 건 전쟁기에 뿌려졌던 삐라. 전쟁을 의미하고 또 댄스홀이라는 건 전쟁에 UN군이 참가하고 미국의 GI문화, 미국 문화의 유입이 본격적으로 진행이 되면서 말하자면 유흥이나 모든 생활 면에서 한국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 정관용> 미치기 시작한.

◆ 홍석률> 네. 그리고 댄스홀이 상징하는 게 뭐냐 하면 한국전쟁이라는 게 아주 크고 참혹한 전쟁이었죠. 오히려 그러한 전쟁을 겪고 나서 사람들은 오히려 강한 욕망과 또 쾌락에 도취하는 그러한 심성들을 갖게 됐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를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그 어려운 상황에서 전후 복구를 하고 또 사람들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는 힘이 됐던 거죠.

◇ 정관용> 실제로 댄스홀이 아주 폭발적으로 늘어났나요?

◆ 홍석률> 그럼요.

◇ 정관용> 50년대 후반에?

◆ 홍석률> 네, 특히 전쟁 때부터.

◇ 정관용> 전쟁 때부터.

◆ 홍석률> 전시 부산에서부터 댄스홀들이 많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1950년대에는 웬만한 지식인, 대학생들도 그렇고 교사들도 그렇고 댄스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대학가 축제 모습을 보면 훨씬 서구적이에요.

◇ 정관용> 그래요?

◆ 홍석률> 거의 남자들은 양복, 턱시도 비슷한 것 입고 여자들은 드레스 입고 댄스파티를 합니다.

◇ 정관용> 학교에서 정규 과목으로 배웠나요, 그런 걸?

◆ 홍석률> 아니죠.

◇ 정관용> 그런 건 아니지만.

◆ 홍석률> 각자 알아서 춤 선생님들을 모시고 자취방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배웠습니다.

◇ 정관용> 그때는 ‘지식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돼’ 이런 거예요?

◆ 홍석률> 네.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 정관용> 그래요, 몰랐네요.

◆ 홍석률> 저희 아버님이 50년대 사범학교, 그게 고등학교거든요. 그런데 그때 그 사범학교 학생들도 댄스를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 정관용> 그래요.

◆ 홍석률> 자취방을 돌아가면서 춤 선생님을 모시고. 지금도 잘 추십니다.

◇ 정관용> (웃음) 그리고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곧 통일될 것이다’ 이런 인식들이 있었나요, 어땠나요?

◆ 홍석률> 곧 통일될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이 분단 상태가 금방 해소될 수도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많은 이산가족들이 생겼는데 그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라는 희망을 50년대 말까지는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정관용> 금방 만나겠지. 이런 식으로.

◆ 홍석률> 네. 예컨대 월남민들은 휴전선 근처에서 많이 살아갔습니다. 특히 동해안 근처에. 그분들은 미국 대사관 관리들이 50년대 말에 그 지역을 답사하고 쓴 글에 따르면 아직도 북한으로 돌아가서 부모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돈이 생겨도 집을 안 짓고 계속 판잣집에서 살면서 돈을 그냥 갖고 있더라는 거죠.

◇ 정관용> ‘금방 갈 건데’ 이렇게.

◆ 홍석률> 네. 58년, 59년까지. 그렇지만 그때도 일부는 그걸 포기하고 집을 짓고 새로 결혼을 하고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월남민들 사이에서는 나쁜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아, 저 놈은 부모하고 자기 아내 만날 생각은 안 하고 여기서 집 짓고 산다’ 50년대 말까지는 대체로 그러한 분위기였던 겁니다.

◇ 정관용> 속초 아바이마을 이런 데가 그런 대표적인 곳이죠.

◆ 홍석률> 대표적인 곳이죠.



◇ 정관용> 그렇죠. 60년대는 ‘근대화와 군대화’ 이런 부제가 붙었습니다. 이건 금방 이해가 될 것도 같은데요? 군사독재가 시작됐고 군사독재가 이른바 산업화, 근대화를 시작했고. 그런 얘기죠?

◆ 홍석률>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산업화라는 건 대단히 돌진적인 형태로, 또 군사독재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업화라는 것이 또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문화 면에서는 군대식 규율과 통제가 또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들어가는 그런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죠.

◇ 정관용> 산업화가 군대식 규율과 함께 갔다.

◆ 홍석률> 그렇죠.

◇ 정관용> (웃음) 공장 분위기도 실제 그랬을까요?

◆ 홍석률> 공장이야말로 대표적이었습니다.

◇ 정관용> 군대식으로.

◆ 홍석률> 네. 군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공들 같은 경우에는 군인들이 계급장을 붙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일 먼저 시작할 때는 10자로 시작해서 1자가 제일 숙련공입니다. 그렇게 번호까지.

◇ 정관용> 10, 9, 8, 7 이런 식으로?

◆ 홍석률> 네, 그렇게 번호가 붙은 모자를 쓰고.

◇ 정관용> 계급장이군요?

◆ 홍석률> 네. 거의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또 여공들을 관리하는 조장들은 호루라기를 들고 있었고 또 완장을 차고 있었고. 거의 그러한 군대식 규율 속에서 돌진적 산업화가 이루어진 것이죠.

◇ 정관용> 그게 60년대다.

◆ 홍석률> 네.

◇ 정관용> 그런데 또한 60년대는 저항의 시작이기도 했잖아요. 4.19도 있었고요. 또 한일협정 반대시위도 있었고 그런 대학가의 풍경 이런 건 어땠습니까?

◆ 홍석률> 그것도 근대화하고 상관이 있는데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근대화라는 건 산업화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었죠. 그렇지만 이미 4월 혁명 때부터 지식인 사회에서 근대화라고 했을 때는 산업화만 있는 게 아니라 민주화도 있고. 또 국민국가의 건설, 통일이라는 문제도 있었던 겁니다.

◇ 정관용> 그렇죠.

◆ 홍석률> 그렇게 다양한 근대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결국 5.16 이후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산업화를 위주로 한 근대화. 또 그 산업화도 수출 주도의 산업화. 이것만 남고 나머지 다른 근대화 노선들은 다 억압되고 다 부차화되니까 거기에 대한 저항이죠.

◇ 정관용> 저항.

◆ 홍석률>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죠.

◇ 정관용> 역시 그 저항의 근거지는 대학가였죠?

◆ 홍석률> 그렇습니다. 4월 혁명 이후에는 대학가가 중심이었습니다.

◇ 정관용> 70년대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이런 게 발병되기 전, 60년대 대학가는 70년대보다는 좀 더 자유로웠었나요?

◆ 홍석률> 네. 확실히 그랬습니다. 60년대 말까지 대학가는 상당히 자유로웠고요.

◇ 정관용> 경찰이 함부로 못 들어가고.

◆ 홍석률> 네. 언론의 자유도 꽤 있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 홍석률> 그러나 유신 이후에는 아주 억압적인 상황으로 바뀌어갔던 것이죠.

◇ 정관용> 그래요. 우리는 보통 60년대를 너무 오래돼서 70년대, 80년대 암흑기를 본 사람들은 60년대는 더하지 않았나 했을 텐데 60년대는 그래도 좀 분위기가 정치적 자유가 있었다.

◆ 홍석률> 네. 상대적으로 70년대 유신체제에 비해서는 아주 자유로웠던 것이죠.

◇ 정관용> 기자들도 좀 막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막 쓰고.

◆ 홍석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자들이 유신체제 이후에 이른바 대량해고를 당하고 그러면서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언론환경도 많이 바뀌었던 것이죠.

◇ 정관용> 바뀌는 거죠. 대학가의 풍경도 60년대는 데모도 자유롭고.

◆ 홍석률> 물론 데모를 하면 잡아가죠. 탄압은 있었지만.

◇ 정관용> 학교 안에까지 들어왔나요, 60년대에도?

◆ 홍석률> 그때도 때때로는 들어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시위는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그렇지만 대학생들이 자유롭게 만나서 토론하고 얘기를 하고 또 적어도 3선 개헌 반대 전까지는 또 자유롭게 시위도 하고. 물론 시위를 하면 많이 잡혀가고 희생당하긴 했지만.

◇ 정관용> 그러다가 아무튼 70년대 유신 긴급조치 이후로는 학내에서조차 시위가 어려워지는 그런 분위기.

◆ 홍석률> 네. 그때 시위는 ‘학시위’라고 하죠. ‘학우여, 학우여’ 외치다가 ‘학’자 얘기하다가 잡혀가는.

◇ 정관용> 한 글자 하면 잡혀가는 거죠. (웃음) 그 70년대를 부제로 ‘새마을운동과 미니스커트’ 이렇게 붙였습니다. 이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 홍석률>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건 당시 국가의 통제, 또 국가주도의 캠페인을 상징하는 거라면 미니스커트라고 하는 건 새로운 청년문화 또 새로운 대중소비문화의 반응을 얘기하는 것이죠. 그리고 결국은 이 새마을운동의 분위기하고 미니스커트가 충돌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권력이 장발을 단속하고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 정관용> 80년대를 ‘스포츠공화국과 양념통닭’이라고 하셨는데. 스포츠공화국은 금방 이해가 돼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도 있고. 양념통닭이 80년대에 그렇게 중요한 키워드입니까?

◆ 홍석률> 그건 80년대 보면 역시 경제개발 3저 호황이라는 게 있어서 경제도 좋았고 또 한편으로는 민주화 운동도 아주 가열차게 전개가 됐지만 또 생활상으로 보면 우리 생활에서 육식화, 육식 문화가 퍼져나간 때가 1980년대입니다.

◇ 정관용> 비로소 고기 좀 먹게 된. 서민들도.

◆ 홍석률> 그리고 일반 서민들이 삼겹살이라든지 양념통닭이라든지 이런 것을 또 먹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경제개발도 물론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주화, 특히 1987년 이후 민주화가 되면서 그 이전에는 노동생산성보다 임금 인상률이 훨씬 적었거든요.

◇ 정관용> 그렇죠.

◆ 홍석률> 그런데 87년 이후에 그나마 임금들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이 통닭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일반 서민들도.


◇ 정관용> 87년 6월 항쟁 그다음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렇게 부르잖아요. 그러면서 노동조합이 또 전국적으로 많이 만들어졌고 그러면서 임금인상도 실제로 좀 이루어졌죠. 그 시점에. 그게 고기 소비로 갔다?

◆ 홍석률> 그런 것이죠. 그래서 70년대, 80년대 초까지는 통닭은 주로 전기구이통닭이었어요.

◇ 정관용> 그랬어요.

◆ 홍석률> 그런데 이건 대량 소비가 안 되거든요. 전기구이 통닭은 통닭 한 번 구우려면 그게 몇 시간이 걸리니까요.

◇ 정관용> 맞아요.

◆ 홍석률> 그래서 잘라서 하는 프라이드치킨, 양념통닭이 유행을 하게 된 것이고. 또 삼겹살도 물론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일반 노동자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소주 한 잔 하면서 삼겹살을 먹기 시작한 건 80년대 중반 이후로.

◇ 정관용> 80년대 중후반부터다. 생맥주집도 이때 처음 생기지 않았나요?

◆ 홍석률> 생맥주집은 70년대에도 있었지만 역시 그건, 도시의 생맥주집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것이었고요. 맨 처음에 맥주라는 게 사실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맥주 먹는다고 하면 상당히 좀 고급스러웠던 것 같아요.

◇ 정관용> 대학을 언제 다니셨죠?

◆ 홍석률> 제가 80년대 중반에 다녔습니다. 84학번이거든요. 그런데 80년대 거치면서 일반 대중들도 즐길 수 있는 술이 생맥주가 된 것이죠.

◇ 정관용> 제가 기억이 나요. 80년대 초반 저는 대학생인데. 길거리에 그냥 서서 생맥주잔을 들고 마시는 집들이 처음 생기기 시작한 게 그때입니다.

◆ 홍석률> 그렇죠.

◇ 정관용> 의자도 없어요. 서서 그냥 생맥주잔 들고 한 잔씩 마시고 그 정도로 보편화됐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 홍석률> 네.

◇ 정관용> 그러면 치맥이라는 문화도 그때부터 있었나요? 치킨과 맥주.

◆ 홍석률> 치킨과 맥주도 80년대부터죠. 양념통닭이라는 게 항상 맥주랑 같이 팔렸으니까.

◇ 정관용> 자, 이 방대한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런 생활문화사는 기존의 역사와 이런 점에서 다르다.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주신다면.

◆ 홍석률> 사람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그 목적은 자기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또 성찰하고 발견하는 그런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랬을 적에 모든 사람들이 다 먹고 있고 집에 살고 가족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과 문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데 결국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본다는 건 자신의 삶과 아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역사를 성찰한다. 그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 정관용> 나이 드신 분들은 본인들이 살아왔던 걸 학자들이 어떻게 정리했나.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그래요, ‘한국 현대 생활문화사’를 들고 오신, 기획위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성신여대 홍석률 교수 함께 만났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 홍석률>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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