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섯, 전문의를 앞둔 신경외과 레지던트 마지막 해. 하루 열네 시간씩 이어지는 혹독한 수련 생활 끝에 원하는 삶이 손에 잡힐 것 같던 바로 그때 맞닥뜨린 폐암 4기 판정은 폴 칼라니티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의사로서 치명적인 뇌 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며 죽음과 싸우다가 자신도 환자가 되어 죽음과 마주친 그의 마지막 2년의 기록이 지적이고 유려한 언어로 펼쳐진다.
2013년 처음 암 선고를 받고 8개월이 지난 2014년 1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죽음을 선고받았지만, 정확히 언제 죽을지는 모르는 불치병 환자의 딜레마를 절실하게 표현했다.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이 남았는지 명확하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할 것이다. 석 달이라면 나는 가족과 함께 그 시간을 보내리라. 1년이 남았다면 늘 쓰고 싶었던 책을 쓰리라. 10년이라면 병원으로 복귀하여 환자들을 치료할 것이다.
내 담당의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말해줄 수 없어요. 당신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해요.”(본문 중에서)
그는 언제 죽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면,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통감한다. 그는 수술실로 복귀하여 최고참 레지던트로서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했고, 인공수정으로 그의 아내 루시는 임신에 성공한다. 그러나 레지던트 수료를 앞두고 암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의사의 길을 포기하게 되고 만삭의 아내 곁에서 사경을 헤맨다. 결국 딸 케이디가 태어난 지 8개월 후 그는 소생 치료를 거부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랑하는 가족들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2015년 3월 폴 칼라니티가 사망한 후, 그가 사력을 다해 써내려갔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이 책의 에필로그는 아내 루시가 집필했다.
저자는 청소년기 문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라는 주제에 매혹되었고, 문학은 삶의 의미를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해 주었다. 그러다가 그는 인간의 정신은 뇌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스탠포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전공한다. 생리적 존재이며 동시에 영적 존재인 인간을 탐구하면서 그는 결국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폴 칼라니티는 바로 그런 소명의식에서 전문 분야를 선택했다. “신경외과는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줄 것 같았다.” 이처럼 인문학적 통찰로부터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치명적인 뇌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해온 저자의 삶은 의학이, 과학이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좋은 의사란 어떤 것인지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진다.
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 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 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당신의 아이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본문 중에서)
그리고 마침내 저자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죽음을 선고받고 자신의 환자들이 처했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는 암에 걸리기 전에도 언제 죽을지 몰랐듯, 폐암 4기 진단이 나온 후에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죽음을 강렬하게 자각하면서. 그는 사뮈엘 베케트의 대사를 되뇌인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죽음을 향해 육체가 무너져 가는 순간에도 미래를 빼앗기지 않을 확실한 희망이 있었다. 화학치료로 손끝이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자판을 누르며 폴 칼라니티는 마지막으로 딸에게 이렇게 편지를 남겼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본문 중에서)
책 속으로
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 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 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뇌수술은 대개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며, 그래서 인생의 중대한 사건들이 그렇듯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가령 당신이나 당신의 어머니가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치명적인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낮은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면?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당신의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95쪽)
심각한 뇌 손상으로 인한 독특한 고통은 때로는 환자보다 가족에게 더 큰 아픔을 준다. 그래서 그 의미를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건 의사뿐만이 아니다. 뇌를 다쳐 머리를 깎고 누워 있는 사랑하는 이의 주변에 모인 가족들 역시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과거를 본다. 그동안 쌓아온 추억, 새삼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 이 모든 것을 그들 앞에 놓인 몸이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들이닥칠 미래를 본다. 외과 수술로 목에 뚫은 구멍을 통해 연결된 호흡보조기, 복부에 낸 구멍으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 장기간 지속되는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과 불완전한 회복. 때로는 환자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112쪽)
어느 날 밤, 옆에 누워 있던 루시가 물었다. “여보, 가장 무섭거나 슬픈 일이 뭐야?” “당신하고 헤어지는 거.” 나는 아기가 생기면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내가 죽은 뒤 루시에게 남편도 아기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최종적인 결정은 루시가 내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녀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할 텐데, 내 병이 악화되면 나까지 돌보느라 더 힘들 것이었다. “아기가 생기면 우리가 제대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루시가 물었다. “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음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아기는 멋진 선물 아니겠어?” 내가 말했다. 루시와 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삶은 아니라고 느꼈다. (173쪽)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너무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보는 곳마다 죽음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짓누르던 근심이 사라지고,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던 불안감의 바다가 갈라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여느 때처럼 나는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 아침을 먹은 다음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179~180쪽)
중병에 걸리면 삶의 윤곽이 아주 분명해진다. 나는 내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그대로였지만 인생 계획을 짜는 능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 (193쪽)
“아버님, 따님을 한번 안아보시겠어요?” 간호사가 내게 물었다. “글쎄요, 내 몸이 너무 차가워서.”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안아보고 싶어요.”그들은 내 딸을 이불로 감싸서 내게 건네주었다. 한쪽 팔로 아이의 무게를 느끼고 다른 팔로 루시의 손을 잡고 있으니 삶의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내 몸의 암세포는 여전히 죽어가거나 아니면 다시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내 앞에 펼쳐진 넓은 지평선에서 나는 공허한 황무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단순한 어떤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계속 글을 써내려가야 할 빈 페이지였다. (229~230쪽)
폴 칼라니티 지음 |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284쪽 |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