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여자다운 게 어딨어"의 저자 에머 오툴은 '여자답다'는 말을 해체하기 위해 직접 몸을 던진다. '여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자 유쾌하고 도발적인 실험에 나선 것이다. 남장하기, 삭발하기, 겨드랑이 털 기르기, 여자랑 섹스하기, 일상 언어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 없애기, 친척 모임에서 집안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기 등. 이 과정에서 독자는 생활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성적 편견을 발견하고, 아주 사소해 보이는 편견을 이겨내는 것조차 결코 녹록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여성에 대한 편견의 기록이며 동시에 그 제약에 길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기록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사회구조적 맥락을 연결시키는 날카로움으로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을 소개하는 페미니즘 입문서이자, '여자가'로 시작하는 말들에 지친 독자를 위한 페미니즘 실천 매뉴얼이다.
에머 오툴을 단숨에 유명인사로 만든 것은 겨드랑이 털이었다. 영국의 지상파 생방송 프로그램에 사회의 미적 기준에 순응하라는 상대 패널의 논지에 맞서는 역할로 출연한 그는 겨드랑이를 번쩍 들어올리고 18개월 동안 기른 풍성한 털을 보여준다. 10분 뒤, 성공적으로 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전화기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메시지 보관함은 터져나가기 직전이고, 하루가 지나자 유럽 전역, 남아메리카, 스칸디나비아, 호주, 동아시아에서까지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왜 여자는 제모를 해야 할까?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들에게 체모는 그들이 겪는 신체적 변화가 수치스러운 것이고 그래서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익히는 가장 강력한 계기다. 털은 여성스럽지 못하고 부자연스럽다고 배운다. 체모 때문에 땀이 더 많이 나고 악취가 난다고 배운다. 하지만 여성의 다리털은 남성의 다리털보다 덜 위생적인가?
미국에서 여성용 면도기가 처음 출시된 것은 1915년이다. 출시와 더불어 '흉측한' 체모를 제거하라는 광고가 줄을 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다리털을 미는 미국 여성이 단 한명도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1964년에 이르자 44세 이하의 여성 98퍼센트가 다리털을 밀고 있었다. 이로써 여성들은 "자신의 몸에 수치심을 느끼도록 조건화됨으로써 자본주의의 이상적인 소비자가 되었다."(228면) 체모는 젠더와 여성성에 대한, 그리고 명백히 여성혐오적임에도 우리가 그저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한 헛소리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인식 끝에 1년 정도 털을 기르는 실험을 감행하기로 한 저자도 어디서나 겨드랑이를 내놓고 편안할 수는 없었다. "면도를 그만두는 건 끔찍하게 힘들었다. 아침 출근 때마다 정상적이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과 자리를 비울 때마다 동료들이 당신의 체모에 대해 뭐라고 수군거릴지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선택지가 이 둘뿐이라면 그것을 진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223면) "체모를 기르기 시작한 뒤에야, 몸의 문제에서 내게는 조금도 선택권이 없었음을 깨달았다."(227면)
오툴은 태어난 그대로 사는 것이 이토록 어렵고 수치스러운 이유를 부르디외의 아뷔뛰스(habitus)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규범 그 자체인 아비뛰스는 사회구성원들의 규범적 행동을 정의하며,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변화시키기가 아주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아비뛰스의 구조가 상당부분 아주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즉 아비뛰스가 단순히 "최선의 행동에 대한 냉정한 믿음의 체계인 것만이 아니라 체화된 일련의 합의"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과연 아비뛰스를 뛰어넘어 수치심마저 없앨 수 있을까?
저자는 더 용기를 내어 인터넷에 털 난 여성으로서의 모험담을 세세히 적고, 그에 따르는 기쁨과 위험을 솔직하게 공유한다. 이 과정은 일부 남성들에게서 폭력적인 반발('털을 밀어버리고 강간하겠다'는 위협적 이메일들을 받아야 했다)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여성들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강간의 위협 앞에서 저자는 이 별것 아닌 듯한 '다른 방식의 수행'이, 고작 털이, 아비뛰스를 뒤흔들고 기존의 젠더 체계에 흠집을 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여성의 삶이란 어디서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11장에서 저자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일화를 소개한다. 사촌언니가 여자들만 부엌에서 일하고 남자들은 젊으나 늙으나 빈둥거리는 꼴을 비난하며 (한국의 명절 풍경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저자에게 여자라고 집안일을 죄 떠맡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자, 15세의 그는 "여자라서 돕는 게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돕는 거지."라고 말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어른의 칭찬세례를 받는다.
20대 후반이 된 (그리고 그사이에 열렬한 페미니스트가 된) 오툴은 오랜만에 고향집에서 가족모임을 갖게 된다. 여전히 모든 음식은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워킹맘인 엄마가 준비한다. 일손이 모자라자 엄마는 당연히 딸을 부엌으로 부른다. 아빠 오빠 남동생은 28년 동안 그랬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뒷정리를 같이 하라는 요구에 아버지는 "요리랑 청소는 여자들이 하고, 남자들은 진짜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라고 대꾸한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저자는 1년 넘게 집을 찾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현상을 보호한다. 저자의 오빠와 남동생이 '가부장제를 강화하자!'라는 생각으로 가족모임에서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에 가치를 두지 않는 체제의 산물이기에 집안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믿을 따름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집안일을 도우라는 말을 들으면 이래라저래라 하는 명령이나 잔소리쯤으로 여기고, 잔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꺼지라고 대답한다. 마찬가지로, 엄마가 '가부장제 만세!'라고 생각하면서 가족의 시중을 들거나 딸에게 남자 가족들의 시중을 들라고 시키는 건 아니다. 엄마는 여성들이 가족들에게 음식을 해먹이고 그들의 자리를 청소하면서 사랑을 표현하게 만든 체제의 산물이다. 이 뿌리 박힌 체제에 맞서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와 저자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아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화나게 만들지 않고서 성역할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하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좀더 부드럽게, 좀더 상냥하게 접근하면 안되겠냐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저자는 단호하게 답한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메시지를 부드럽게 전달해야 한다고, 보다 상냥하게 굴어서 남자들도 이 운동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건 헛소리다. 우리의 의도는 남성의 특권을 해체하는 것이며, 여기에 설탕옷을 입힌다는 건 불가능하다"(351면)고, 주변과 불화하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불평등을 인정하지도,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보다는 동등하게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에머 오툴이 처음부터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출할 때는 화장을 빼먹지 않고, 다리털을 매끈하게 밀고, 헤어스타일에 비싼 돈을 들였으며 날씬해지겠다는 강박으로 거식증에 시달리던, 본능적으로 직장에서는 책을 많이 읽은 티를 내지 않던 평범한 여자였다. "저는 한번도 성차별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외치던 안티 페미니스트였던 그는, 어느날 자신이 자발적으로 성차별적 가치를 받아들이며, '여자다움'을 애써 연기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젠더는 수행'이라는 버틀러의 말처럼, 그는 열아홉살을 기점으로 자신의 젠더를 다르게 연기해보기로 한다. 저자의 실험은 다양한 범주를 오간다. 핼러윈 밤에 수염을 그리고 남자 옷을 입고는 남성으로 사는 자유를 누린 경험을 시작으로 양성성 실험을 시작한다. 치마와 바지, 긴 생머리에서 삭발한 민머리로 여성과 남성을 오간다. 파티 댄스플로어에서 남자들이 웃옷을 벗어던질 때 함께 상의를 벗어던짐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결부되는 성적 금기를 시험해본다. 대규모 누드 사진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일상 언어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을 지우고 대화를 해본다. 그럼으로써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 그저 공연일 뿐"(109면)이며 간단히 젠더의 상징을 바꿔 쓰는 정도만으로도 성적 고정관념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젠더의 이분법이 얼마나 임의적인지 드러내고, 독자에게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이 무엇인지, 젠더 규범이 꼭 지금과 같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질문한다.
이 모든 실험에 대해 그런다고 뭐가 바뀌느냐고 물을 수 있다. 저자는 페미니즘이든 어떤 운동이든 근엄하고 진지해야만 효과적인 것은 아니며, 우리는 유희로써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답한다. 유희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도구다. 유희는 그저 유희가 아니라 언제나 그 이상이다. 즉 오툴의 이야기는 몸으로 겪은 젠더 문제의 체험담인 동시에,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직접 몸을 던진 모험담이다.
오툴이 이 책에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모두가 털을 복슬복슬하게 기르고, 화장품은 불태우고, 볼품없는 옷을 꿰어 입자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거짓말 가운데 하나는 페미니즘이 패션과 치장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재수 없는 페미니스트들의 전형적인 차림새에 걸맞은 의상을 입는 것은 젠더 렌즈를 깨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상징이 아니라 그 상징들이 나타내는 바다. 긴 머리는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아야 하고, 짧은 머리는 공격성을 의미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치마 같은 여성성의 상징들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의 성차별적 문화에서 여성성의 상징에 결부되는 의미들이다."(134면)
정답은 젠더의 상징들을 조작하는 것일 테다. 상징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뒤섞어보는 것이다. 멋을 내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멋지게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민낯으로 거리를 거닐자. 삶의 방식을 생식기의 종류로 규정받지 않을 자유를,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오툴이 전하는 메시지다. "남자나 여자라는 것에 객관적 의미가 부재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정체성과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젠더 연기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144면)
오툴이 10년간 직접 실행한 다양한 실험들은 독자에게 실감나고 통쾌한 간접경험을 선사한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차별을 발견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그 경험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계,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몇가지 실험과 대안들은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맞는 유희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툴은 흘러넘치는 금기와 차별에 이의를 제기하고 젠더를 비틀어보는 노력을 통해 "여자들이 여자가 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390면) 보여준다.
한국에서 이런 '급진적'인 실험은 너무 이른 일이라고? 꼭 지금부터 삭발을 하거나 겨드랑이 털을 기르지 않아도 좋다. 화장하지 않은 민낯으로 도시를 거닐어보는 일도 여성들에게는 충분히 모험이며, 여성을 둘러싼 견고한 세계에 조금이나마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도전이다. '여자답게'라는 말이 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고 억누르는 표현이 아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미래는 여성들의 작은 실험들로 시작될 것이다.
책 속으로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그저 의상일 뿐이다. 세계는 연극이고,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의상이고, 연극이고, 연기다. 젠더라는 안무를 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분장에 지나지 않는다. (제3장 분장, 122면)
첫 삭발은 페미니스트로서 택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나의 페미니스트 정신을 입 맞춰 깨웠다. 사람들이 삭발한 머리를 보고 내가 공격적일 거라고 추측한다면, 지금까지는 긴 머리를 보고 내가 수동적일 거라고 추측해왔을 것이다 젠더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작은 행동으로 인해 내가 불행하고 불안정하다고 추측한다면, 관습에 따라 여성성에 순응한 것이 사회 적응과 정신건강의 징표라고 추측할 것이다. 짧은 머리를 보고 나를 동성애자로 분류한다면, 긴 머리를 보고 나를 이성애자로 분류할 것이다. (제4장 현실 재현의 난관, 132~133면)
남녀의 뇌 기능 차이로 인해 여자아이들은 분홍색을, 남자아이들은 푸른색을 선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여자를 분홍색과, 남자를 푸른색과 연결하는 경향은 고작 60년 전에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소년들이 (강하고 활동적인 색인) 분홍색, 소녀들이 (얌전하고 섬세한 색인) 푸른색 옷을 입었다. (제4장 현실 재현의 난관, 141면)
내 몸에는 전혀 잘못된 점이 없다. 형편없는 90년대풍 자기계발서처럼 들릴 위험이 있다는 건 알지만, 당신의 외모가 사회적 이상형과 다른 것이 당신의 몸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 내가 치장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꾸미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동료들이 우리 얼굴을 보고 아침 먹은 걸 토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민낯으로 출근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문제다. (제5장 의상을 벗고, 189면)
내게는 피부를 드러낼 자유가 있었지만, 규범에 맞는 여성적 의상을 입을 때 드러나는 나의 신체 부위들은 '여성화'되었을 경우에만 노출에 적합하다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여성화 과정에는 종종 돈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미용산업의 주머니를 내 돈과 시간으로 배불려야 했다는 말이다. (제7장 털 난 아가씨, 별 탈 없나요? 226면)
마야 앤절루는 말한다.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기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제11장 그대의 관객을 알라, 353면)
에머 오툴 지음 | 박다솜 옮김 | 창비 | 408쪽 |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