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이란? 생명을 되돌려 주려는 노력"

신간 '폐허에 살다:발굴해서 역사를 찾는 고고학자들 이야기'

신간 '폐허에 살다"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고고학의 이면과 고고학자의 일상을 발굴해 우리 앞에 복원한다.

카리브 해에서 지중해로, 미국 동부 앞바다에서 남미 페루의 마추픽추로. 고고학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 이 책의 저자 메릴린 존슨. 그는 전문가들과 함께 18세기 사탕수수 농장을 발굴하고, 아폴론 신을 기리는 기원후 1세기의 그리스 신전 터를 탐사한다. 광막하고도 음산한 숲 지대에서 과학수사 고고학자들과 시신 사냥에 나서는가 하면, 고대 음료 전문 고고학자와 맥주잔을 기울이고, 동굴에 살았던 원시인들이 사용한 석기를 재현한다. 이렇듯 저자가 기꺼이 경험하고 겪어내는 고고학의 세계와 고고학자의 일상은 읽는 것만으로도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고학자들은 석기에서 깨진 항아리, 흙에 이르기까지 보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작업한다. 고고학자들은 사물이 깨지고 부서지고 분해되는 과정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는 전문가이며, 일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것인지 주변 맥락까지를 날카롭게 추정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고고학자들은 인디애나 존스처럼 화려하고 역동적인 모험가가 아니라, 부식돼 사라져가는 과거의 파편 속에서 진짜 이야기가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다. 작은 삽 하나 달랑 들고 고된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인내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저자는 고고학자들의 이런 고집과 헌신에 매료된다. 그래서 그들을 쫓아 ‘진짜 현장’에 동참하는 동시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고고학자의 활동 영역을 취재한다. 카리브 해에서 진행된 필드스쿨(체험용 발굴현장)에 참여해 직접 땅을 파보고 현장을 지휘하는 고고학자의 전반적인 업무를 관찰하는가 하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의 차디찬 바다에서 수중고고학이라는 고고학의 새로운 미래를 만나기도 한다.

고고학자가 필요한 곳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대의 신전, 폐허가 된 유적지뿐이 아니다. 9·11테러를 비롯한 사고 현장에서 사망자의 신분증과 유품을 찾아 가족에게 돌려주고, CSI(과학수사대)와 함께 숲 지대를 뒤지며 시체가 묻혀 있을 만한 곳을 찾는다.

저자는 전 세계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와 손잡은 고고학자들을 취재하고, 한국에 주둔하게 된 남편을 따라 1970년대 초 한국에 와서 '한국의 고고학'이라는 책까지 펴내며 한국의 고고학을 전 세계에 알린 사라 넬슨도 만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왜 그들이 지구 표면을 긁어 파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됐으며, 그런 일이 왜 중요한 것인지 탐색하고자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력의 고고학자들은 대단한 소명의식이나 책임감에서 고고학에 일생을 바쳤다기보다는 역사 속에 묻힌 패배자들의 이야기, ‘갈라진 틈 사이로 빠져버린 역사를 어떻게 해서든 다시 길어 올리는’ 소생의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런 단순하고 명료한 이유가 그들을 고단한 현실에서도 발굴현장으로 이끄는 힘이며, 자신의 일에 헌신하는 이유다. 이제는 너무나 낡은 이야기가 되어버린 자신의 일에 대한 맹목적인 몰입과 열정이 주는 감동은 이 책에서 또 한 번 의미 있는 가치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런 열정만으로 일에 몰두하기에는 고고학자들의 현실이 녹록치 않다. 그들은 우리의 소중한 과거를 발굴해서 이해하는 힘든 작업을 수행하지만 사회적 지원은 거의 받지 못한다. 저자의 취재로 드러난 고고학계의 현실은 이것이 과연 학문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가 싶을 만큼 놀라움을 안긴다. “문화 유물과 유적을 꼼꼼히 연구하고 보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많은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고고학자들도 최저 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임금을 주는 일자리를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126쪽) 평균적으로 화가보다도 월급이나 임금이 낮으며, 실업 상태인 고고학자가 50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2014년에 ‘인류학과 고고학’을 최악의 대학 전공 분야로 선정할 정도다.

고고학자들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고스란히 고고학계가 처한 열악한 재정적 기반과 연계되는데, 이는 고고학계에 대한 지원이 줄어듦으로써 고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고사할 위기에 놓이는 배경이 된다. 쌓여가는 컬렉션의 목록 작성을 위해 지원되는 자금은 전혀 없으며 수집된 유물들은 도처에서 고아처럼 버림받고 있다. 문화 발굴을 맡은 자원관리회사들이 폐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게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보다 더 큰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여전히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도굴과 무분별한 개발이다. 도굴품은 전 세계적으로 마약과 무기에 이어 거래 규모가 3위에 달한다. 연간 60억~70억 달러 규모로 도굴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범죄행위라는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현장에서 유물을 도굴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동전이나 조개껍데기라고 할지라도 ‘역사적 맥락’을 훔침으로써 ‘역사의 한 부분을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막대한 경제적 이익 앞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개발 사업도 고고학의 치명적인 적이다.

이처럼 저자는 고고학계가 처한 현실, 고고학의 기반을 흔드는 국제적인 문제에도 초점을 맞춤으로써 고고학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걱정한다.

고고학자와 고고학계가 처한 문제는 심각하며 당장 해결하기 힘들 만큼 근원적이다. 가치 있는 유물과 유적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위대한 유적지는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 유물과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이것을 격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고고학자와 고고학계 앞에 놓인 이런 묵직한 질문들은 저자가 고고학의 깊숙한 곳에서 캐낸 성찰이자, 우리 앞에 던져 놓은 난제다.

수많은 고고학자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살아 있는 고고학을 접한 저자는 처음에 던졌던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어려운 질문, 즉 ‘고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돌아간다. 그리고 고고학자들과 직접 부대끼면서 나눈 경험과 대화를 통해 이런 결론을 얻는다. “그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며 수천 또는 수백만 년 동안 잊히고 파묻혀 있던 것들에게 생명을 되돌려주려는 노력”(340쪽)이라고. 그렇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지나간 인간의 역사에 발을 담그고, 죽어 있던 것을 되살려내는 작업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고고학자는 괴팍하고, 어떤 고고학자는 지나치게 고집불통이며, 어떤 고고학자는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학문적 태도가 인류의 역사를 풍요롭게 복원하고 우리에게 지나간 인간의 역사를 들려주는 원동력이 된다. 저자 메릴린 존슨은 그런 고고학자들의 진중한 삶을 애정과 경외심을 가지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런 고된 작업을 맥주와 농담으로 경쾌하게 이겨내는 고고학자들의 삶처럼, 어쩌면 누추하고 고달픈 그들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길어 올린다.

책 속으로

그들은 우리의 소중한 과거를 발굴해서 이해하는 힘든 작업을 수행하지만 사회적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다. 역사가 영원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포착하는 것이 고고학자의 과제라면 그들은 과연 그런 과업을 얼마나 잘해낼 수 있다고 자부할까? 우리는 고고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서관 사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자들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노고가 어떠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좌충우돌 모험가 스타일의 고고학자는, 부식돼 사라져가는 과거의 파편 속에서 진짜 이야기가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고고학자의 참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10~11쪽)

그들은 어쩌다가 지구 표면을 긁어 파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됐을까? 그런 일이 왜 중요한 것일까? (12쪽)

고고학자들은 미스터리와 함께 살아간다. 어떤 유적지를 어렵게 발굴해서 다각도로 연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고고학 연구를 통해 인류의 과거를 말해줄 생생한 파편들을 모으지만 과거로 올라갈수록 인류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림은 더더욱 불완전해진다. (76쪽)

“좋은 고고학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지요. 그것은 패배자들의 이야기를 말해줍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빠져버린 역사를 어떻게 해서든 다시 길어 올리는 거지요.” (202쪽)

“아니요, 아닙니다. 현장에서 감정이란 건 없습니다 .”샌디가 단호히 말했다. “그냥 맡은 일을 하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프리카인 묘지 같은 경우 사람들에게 우리의 견해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다,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이게 뭐지?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 그것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감동을 받고 말고는 역사 유적 보존을 담당하는 주 정부 공무원들에게 달린 일이지요.” (237쪽)

“고고학자는 회의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여러분의 할아버지들이 해준 얘기 세 가지만 저한테 말해보세요. 그럼 저는 아주 주의 깊게 듣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인지는 반드시 의심해볼 겁니다. 우리는 땅에서 증거를 찾습니다. (240쪽)

고고학자들이 관여하기 이전에 미 국방부 데이터베이스에는 리비아 보호대상 문화유적지 30곳 정도가 입력돼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목록은 242곳으로 늘었다. 7개월 간 폭격이 계속됐지만 그 유적지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280쪽)

메릴린 존슨 지음 /이광일 옮김 / 책과함께 /368쪽/ 1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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