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마음이 먼저 좋아하는 말

신간 '그 한 마디에 물들다'

“우리들의 악기가 오래돼서 망가져갑니다. 음악이 없으면 우리도 그렇게 될 겁니다”
_ 앨런 와이즈먼
퇴근 후에 악기를 배우러 다니는 미혼 남자가 있으면 무조건 연애를 하시기 바랍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피아노 건반을 밟듯이 올라가는 여자가 있으면 무조건 결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고대 제사장이나 주술사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거나 띠띠까까 호숫가 마을이나 가비오따스 마을 주민이어서 분명 가끔씩 달밤의 숲속 마을 음악회에 합주공연을 가면서 당신들을 데려갈 겁니다.
우리에게 늘 시급한 것도 나를 일사불란한 편리함의 노예로 만들고 그러다가 언제든 내 목을 졸라서 내 몫의 일자리와 자존심까지 사그리 빼앗아갈지 모를 문명의 이기들이 아니라, 하모니카든 드럼이든 첼로든 한 가지 악기들과 음악이란 것, 잊지 맙시다.
_‘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중에서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밤늦은 시간 클래식 FM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수많은 청취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그 한마디에 물들다'가 책으로 엮여 출간되었다.

고흐의 별빛 같은 행복에서 톨스토이의 돌아설 줄 아는 지혜, 루이제 린저의 타협 없는 몰입과 자유의지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용기에 찬 고독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준 한마디들과 김경미 시인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생각이 더해져 감동을 더한다.


온 힘과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생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아낸 영혼들의 진실하고 깊은 이야기들은 때로는 농담처럼 가볍고, 때로는 연애편지처럼 달콤하고, 때로는 유언장처럼 비장하게 생의 진실을 들려준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고른 40여 점의 명화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책 속으로

“나는 그림을 그리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고 있어. 하지만 행복하단다.”
_빈센트 반 고흐
생은, 특히 무명예술가의 생은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지요. 얼마나 굴욕적이고 모욕적이며 상처투성이인지요. 그런 치사하고 더러운 것들에서 우리의 손과 입과 가슴을 끝내 순수하게 지키는 방법 중의 하나야말로 누가 뭐래도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고흐식의 즐겁고 숭고한 자기만의 가치를 사수하는 것, 그 어떤 치사함과 더러움으로도 결코 파탄나지 않는 밝은 노란색이거나 파란색 별 하나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사는 일일 겁니다. 그 ‘고흐식 별빛’만 가슴에 품고 있다면 제아무리 더럽고 치사한 세상도 ‘만나기만 해봐라’일 겁니다.
_ ‘언제고 폭죽 같은 별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것’ 중에서

“다시 창조해 달라고 청하면서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삶.”
_ 메이 사튼
순간 크로커스며 라벤더, 과꽃, 금잔화와 장미, 제비꽃들과 잡초로 가득한 그녀의 거대한 정원이자 목초지에서 딱 하나뿐인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어린 시절에 자주 했던 ‘술래잡기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늘 같은 동네인데도 어디 좀 더 깊숙이 숨을 곳이 없을까, 거꾸로 그렇게들 더 깊이 숨어 있을 곳이 어디쯤일까, 늘 궁리하게 만들던 놀이였죠. 참 좋아했던 놀이였습니다.
메이 사튼의 저 구절을 마주하니 문득 그때 그 동네 골목들이며 이런저런 구석과 틈들에 숨어 있던 게 함께 놀던 동네 친구들만이 아니라, 다가올 삶의 어떤 재료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그곳들에야말로 내 손과 내 창조력으로 자신들을 뭔가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던 시간들이 가득했었음을 이제야 또렷이 알겠습니다. 전력투구!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전력투구,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술래잡기에 나선 아이처럼 다시 처음인 듯이 생을 찾으러 다니겠습니다. 어딘가에, 어쩌면 빤한 곳에 숨어 있을 삶을 새로 찾아서 재창조해보겠습니다.
_ ‘저기, 삶의 재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중에서

김경미 지음 / 책읽는수요일 / 328쪽/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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