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나는 인간이 사랑과 투쟁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을 사랑한다"

파블로 네루다 대서사시 '모두의 노래'

사랑의 시인, 저항의 시인,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중남미 민초들을 대변한 칠레의 외교관 · 정치가인 파블로 네루다의 대표작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가 출간되었다.

'모두의 노래'는 칠레인, 아메리카인으로서의 자신의 뿌리를 탐구하고 인류의 정의 구현을 염원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보여준다.

이 책은 스페인 내전 당시 영사로 근무했던 네루다가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하다 해임되어 귀국한 1938년부터, 파리의 난민 담당 영사를 거쳐 멕시코 총영사로 근무하고 돌아와 정치가로 활동하다 정권의 박해를 피해 1949년 망명하기까지의 시를 모아 1950년에 펴낸 것이다.

앞선 작품들에서 내면세계의 감정, 고뇌, 갈등을 표출했던 네루다가 시의 방향을 전환한 이유는 스페인 내전 때문이었다. 민중의 삶의 질을 좀더 높이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세력의 충돌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네루다는 시인의 역할이, 자신의 역할이 시대의 충실한 증언자라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모국 칠레의 현실을 증언하려 했으나, 멕시코 총영사를 마친 뒤 귀국 길에 들른 페루의 마추픽추에서 그의 소명은 중남미 전체, 카리브 해 그리고 미국, 유럽의 그리스, 소련까지 공간적 범위를 넓힌다. 또한 잉카 시대의 유적을 보면서, 현재 시점부터 유적지를 건설한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 그 이전 시대, 아메리카에 인류가 살기 시작했던 시원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적 약자, 가난한 노동자, 평범한 민초들을 대변했던 시인 네루다는 중남미 원주민의 문화를 내적으로 소화하여 당대의 민중의 삶과 접합함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한 대서사시를 완성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 소수의 사람들만이 감지하는 세계에 익숙한 귀를 가진 독특한 이 시인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네루다는 철학보다는 죽음, 지성보다는 고통, 잉크보다는 피에 근접한 시인이다.” _가르시아 로르카(스페인 시인, 극작가)

시인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신을 둘러싼 외적 현실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주변 현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감시하고 반추하며, 이들을 이미지화해서 자신이 보는 관점의 세상을 시로 재창조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인은 시대의 충실한 증언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모두의 노래'는 전체가 사회적, 역사적 증언만은 아니다. 네루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연환경, 동식물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이들을 주제로 시를 썼다. 「위대한 대양」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양과 관련된 동식물, 조개, 해양도시, 바다를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 속으로

그 역사를 말하려고 나 여기 있다.
버펄로의 평화부터
지구 끝단, 영겁의 남극 빛 거품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낸 모래까지,
그리고 그늘진 평화가 깃든 베네수엘라의
깎아지른 곳에 난 굴에서까지
그대를 찾았다. 조상이시여,
검은 구릿빛의 젊은 무사여, [……] (I. 지상의 등불_22쪽)


투쟁하며 죽었던 이들을 당신들에게 인도하는 날,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삭은 땅에 주어진 하나의 밀알에서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은 밀처럼 뿌리를 모으고,
이삭을 모아,
고통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밝은 곳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IV. 해방자들_260쪽)


아메리카, 나는 너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다.
마음에 칼을 매달고
영혼에 떨어지는 방울을 참고,
창문으로 새로운 너의 날이 내게 밀려올 때,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를 만들어낸 빛 속에 있고
나를 규정하는 그림자 안에서 산다.
포도처럼 달콤하나 끔찍하고,
설탕을 만드나 체벌이 기다리는 너,
너와 같은 종류의 정액에 젖어,
네 유산의 피를 마시면서,
너의 본질적 여명 속에서 자고 깬다.
(IV. 아메리카, 나는 너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다._374~75쪽)


내 병든 심장은 여기 있네, 내 몸의
피멍을 보게나, 얼마나 살게 될지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그대에게 다른 건 요구하지 않겠네, 그저
그 못된 인간이 민중에게 하는 짓을 말하게.
우리처럼 고산지대로 끌려간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그자는 하이에나처럼 웃고 있다네. 동지,
그대는 이걸 말하게, 말해야 하네. 투쟁이 길어지니,
내 죽음은, 우리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네.
그러나 이 고난은 알려져야 한다네.
동지, 이 고난은 알려져야 하고, 잊혀서도 안 되네. (VIII. 그 땅 이름은 후안이라네_425쪽)


“자, 이제 나가서 대통령께 자유를 달라고 해라.
그 양반이 네게 이 선물을 보낸 거거든”이라고 하더군.
몽둥이찜질을 당했지. 이 갈비뼈 그때 부러진 거야.
그런데 내 속은 옛날 그대로야, 동지.
죽이지 않고는 부러뜨릴 수 없는 게 우리지. (VIII. 그 땅 이름은 후안이라네 442~43)


나는 일개 시인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를 사랑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세계로 떠돌아다닌다.
내 나라에서는 광부들을 가두고
군인들이 판사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작은 추운 나라의
뿌리까지도 사랑한다.
죽어야 한다면, 천 번이라도
고국에서 죽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면, 천 번이라도
고국에서 태어나고 싶다.
[……]
광부, 어린 여자아이,
변호사, 어부,
인형 만드는 사람이 내게로 와서
함께 영화관에 들어가고
가장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러 가기를.

나는 그 어떤 것도 해결하러 오지 않았다.

네가 나와 함께 노래하도록
노래하러 왔다. (IX. 나무꾼이 잠에서 깨기를_481~82쪽)


나는 내 민중이 제공한 층계를 통해,
내 민중이 숨겨주는 동굴에서,
내 조국과 비둘기 날개 위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꾸고, 네 국경을 쳐부순다. (X. 도망자_505쪽)


지상의 어둠에서
밤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민초, 셀 수도 없는 민초이다.
내 노래는 침묵을 통과할
순수한 힘을 가졌고
어둠 속에서도 배태된다. (X. 도망자_508쪽)


나는 다른 책들이 나를 가두도록 글을 쓰지 않고,
백합을 열심히 배우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쓰지도 않는다.
대신 물과 달, 바꿀 수 없는 질서의 요소들,
학교, 빵과 포도주, 기타와 연장이 필요한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

민중을 위해 글을 쓴다. 비록 그들이
투박한 눈으로 내 시를 읽지 못한다 해도.

단 한 줄이, 내 인생을 뒤흔든 대기가
그들의 귀에 닿을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면 농부는 눈을 들 것이고
광부는 돌을 부수면서 미소 지을 것이고,
공장 직공은 이마를 훔칠 것이고,
어부는 파닥대면서 그의 손을 태울
물고기의 반짝임을 더 잘 볼 것이고,
갓 씻어 깨끗해진 정비공은 비누 향기 풍기면서
나의 시를 볼 것이고.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동지였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왕관이다. (XV. 나는_위대한 기쁨_685~87)

파블로 네루다 지음 / 고혜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732쪽/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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