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맞서 6번 투옥…'길 위의 목사' 고(故) 박형규의 발자취

지난 18일 별세한 민주화 운동 원로 박형규 목사의 빈소가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어 있다. 사진은 19일 오전 박 목사의 빈소 모습.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반(反)독재 투쟁에 헌신했던 박형규 목사가 18일 오후 자택에서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군사 독재에 맞서 싸우다 6차례 감옥에 투옥됐다. 정부의 박해로 교회에서 쫓겨나 거리에서 6년간 예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길 위의 목사’라고 불렀다.

그의 실천하는 삶의 근간에는 신실한 신앙이 있었다. 그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면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힘없는 자 편에 항상 서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이 그랬기 때문에"라며, “불의한 시대에 성직자가 감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4.19혁명을 계기로 평범한 목사에서 투사가 되고, 목회 은퇴 이후에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고 박형규 목사의 발자취를 쫓아가 본다. 기사는 그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2010, 신흥범 정리, 창비)를 참고했다.

◇ 4.19 혁명, 평범한 목사를 투사로 만들어

1923년 경남 창원군(현 마산시)에서 태어난 박 목사는 1959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서울 공덕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던 중 이듬해 4.19 혁명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뀐다. 그는 당시 청와대 근처인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길 총소리와 함께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충격을 받았다.

“들것에 실린 학생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무언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중.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며 박 목사는 결혼식 주례나 하고 사회와 정치 문제에는 나 몰라라 무관심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엉터리 목사로 살아온 것을 거듭 뉘우치고 진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현실 도피적인 ‘값싼 복음’을 파는 목회를 청산하고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처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에 바치기로 맹세했다. 실천하는 신앙인 박형규 목사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행위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넘어서야 한다. 현실 속에서의 삶의 구원, 사회적인 구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삶이 사회 속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구원받게 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역사에 참여하여 역사도 구원받게 해야 한다. 아니 그것을 넘어 세계의 구원 자연의 구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중.

◇ 박정희 전 대통령 향해 “사울 왕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박형규 목사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73년 4월 유신체제를 비판한 ‘남산 야외 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때문이다.

이 해 부활절 새벽예배는 한국 기독교의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보수세력 연합체인 대한기독교연합회가 함께 하기로 한 최초의 연합예배였다. 그는 이 예배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시위를 계획한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유신정권의 살벌한 강압조치로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어디에서라도 조그만 목소리를 내서 이 상황에 돌파구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모이는 부활절 예배야말로 좋은 기회가 아닌가?”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중.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플랜카드와 전단을 만들었다. 문구는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선열의 피로 지킨 조국, 독재국가 웬말이냐” “서글픈 부활절, 통곡하는 민주주의” “사울왕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였다. 하지만 삼엄한 경비 탓에 플랜카드는 걸리지 못했고, ‘유신독재 물러가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만이 일부 배포됐다.

이 사건으로 권호경 목사, 김동완 목사, 남삼우 씨 등과 함께 국군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기소된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3개월 후 금보석으로 석방된다. 이 사건은 38년이 지난 뒤인 2012년 9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 이어지는 반독재·민주화 투쟁, 그리고 투옥


첫 투옥 이후 박형규 목사는 감옥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게 된다. 두 번째 투옥은 바로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이었다. 거사 자금을 댔다는 명목으로 그는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및 국가내란음모혐의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는다.

10개월 복역 후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박 목사는 두 달 뒤 다시 구속된다. 서울시경이 꾸며낸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선교자금 횡령 및 배임사건’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는다.

1976년 2월 만기 출소한 박 목사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이름을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바꾸고 빈민선교의 쇄신을 꾀한다. 하지만 빈민선교를 적대시해오던 유신당국이 그해 5월 다시 박 목사를 잡아넣고 ‘용공세력’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1978년 8월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국연합회전주교육대회(기청대회) 시위 사건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기소되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는다. 그는 10개월 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이어 1987년 6월항쟁 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열기 위해 ‘국본’ 공동대표와 집행위원들이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에 모여 대회를 주관,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1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된다.

민주화운동 중 잦은 투옥과 고문이 두렵지 않았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박 목사는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할 수밖에 없어서 한 것”이라 답하곤 했다.

“민주화운동의 길을 걷게 된 것도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 그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았다. 발길에 차여서, 떠밀려서 안 할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하나님만이 나를 떠민 것이 아니었다. 함께 일한 동료들, 후배들에게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렇게 나를 떠민 그들이 옳았고, 그래서 그들에게 감사했다.”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중.

◇ 6년간 노상예배…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

유신 체제가 박형규 목사를 감옥에 가두는 식으로 박해했다면, 전두환 정권은 그를 교회에서 몰아내기 위해 신자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국가보안사령부는 교인들을 협박해 교회를 옮기게 했고, 남아 있는 교인들에게는 박 목사가 예배하지 못하게 사주했다.

1983년 8월 박 목사를 반대하는 교인들의 예배방해가 진행됐고, 이듬해에는 교인도 아닌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교인들을 폭행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뒤늦게 나타나거나, 폭력행위 때에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교인들이 줄지 않자, 폭력배들이 박 목사와 교역자 2명, 청년 13명을 60시간 동안 감금한다. 이때도 경찰들은 4시간 늦게 출동하고, “교회 내부 문제이므로 교회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면서 교회 밖에서 걱정하는 교인들을 밀어냈다. 이후로도 박 목사는 살해 위협, 백주의 테러를 당했다.

예배당 출입을 저지당한 박 목사와 교인들은 교회 앞 길거리에서 시작해 중부경찰서 앞으로 가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십자가 행진’을 통한 노상예배를 시작한다. 노상예배가 6년간 이어지면서 ‘지역교회의 범위를 넘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크리스천들의 행진’으로 발전해갔다.

독일에서 설교를 하러 온 울리디 두크로우 목사는 노상예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큰 교회는 처음 보았다. 서울제일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다. 천장이 없으니 하늘이 천장이고, 벽이 없어 막힌 곳이 없으니 온 세계로 열려 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 온 우주로 열려 있는 교회다. 이보다 더 큰 교회가 이디 있겠는가.”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중.

◇ "일생을 돌아보면 후회되지는 않아요"

박 목사는 1992년 만 69세의 나이에 목회 활동을 은퇴한다. 그 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운동과 민족통일 및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고문(1992),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1993), 노동인권회관 이사장(1995),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1996~199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2010년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일생을 돌아보면, 후회되지는 않아요. 여러 유명한 목사 많은데, (저는) 훌륭한 목사는 아니지만 나 같이 재밌게 산 목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감옥도 가보고, 고문도 당해보고 온갖 일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는게, 어떻게 보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목사일지도.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나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고 생각을 합니다."

목회자로서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실천하기 위해 저항 운동에 뛰어들었던 박형규 목사. 그를 떠나 보내는 빈소는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2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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