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발표된 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한 시인 원재훈의 총평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연설하는 실수를 범했다. 안 의사 순국지는 하얼빈이 아닌 뤼순의 감옥이었다.
안중근(1879~1910)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오전, 당시 러시아 땅이던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제의 최고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 의사는 일제에 신병이 인도되면서 곧바로 일제가 관할하던 뤼순으로 압송 당했다. 일제는 이듬해 3월26일 사형을 집행하고 안 의사를 뤼순 감옥 인근에 매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보낸 11일간의 행적을 충실히 뒤따른 책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사계절·2008)을 쓴 원재훈은 16일 실수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이 경축사를) 박 대통령이 직접 쓰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박 대통령이 (오류를) 못 잡아낸 게 문제라면 문제일 텐데, 설령 (안중근 의사의 순국지가 하얼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못 볼 수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뭔가 하나에 집중하면 주위가 잘 안 보일 때가 있잖아요. 작가들도 자기가 쓰는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면 오탈자가 잘 안 보일 때가 있어요. 그걸 편집자가 잡아주는 거죠. 경축사 뒤에 들어간 북한, 사드 문제를 비롯해 노동 문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인데 여기에 집중하다보니 도입부에 대한 세밀한 확인을 건너뛴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안중근 의사 순국지 오류, 목적에 치우쳐 중요한 도입부 우습게 본 탓"
시인은 "경축사 가운데 '한 세기 전, 우리는 헤이그에서 밀서를 품고 이리저리 뛰어도 호소할 곳조차 찾을 수 없었던 약소국이었지만, 지금은 G20의 일원으로 세계 경제 질서를 만들어 가는 데 직접 참여하며 국제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가고 있습니다'라는 부분 역시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문장에서 '약소국'이라는 표현이 몹시 걸리네요.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사건은) 고종의 결단이었어요.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폐위시킬 만큼 파급력이 컸던 사건이잖아요. 당시 헤이그 특사들이 왜 호소할 곳을 찾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앞뒤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글이 나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헤이그에서 밀서를 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 바친 위대한 영혼들'이라고 표현을 바꾸면 문맥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전후좌우 상황을 모두 알고 그것을 통찰하는 힘을 바탕으로 문장을 써야 좋은 문장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헤이그에서 그랬다더라'라는 식으로 하나의 사건만 짚어내는 것은 유아적 상상입니다. 대통령께서 남 탓만 하면서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그게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옵니다."
"이는 제국주의 영국을 상대로 비협조·불복종 투쟁을 벌인 간디를 두고 '주먹 한방 못 날리고 이리저리 휘둘린 못난이'로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원재훈의 날카로운 비유다.
"개인은 물론 국가는 위협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평가를 받습니다. 간디의 위대함은 위대한 정신에 있잖아요. 일제에 대항한 구한말 의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시 위대한 정신을 품고 있어요. 그런데 박 대통령의 경축사는 이러한 정신을 폄훼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가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기 위해 나머지 부분을 보지 못하는, 통찰력 부족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죠."
◇ "치욕의 역사 속 위대한 정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목적이 너무 강하다보니 나타났다고 보더라도 굉장히 커다란 실수인 거죠. 사실관계를 체크하지 못했던 청와대가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문호 옥타비오 파스의 표현을 빌리면 근대라는 시기는 여태껏 내려온 것과의 단절과 창조를 의미합니다. 이는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요. 우리네 일제 강점기가 그렇죠. 이 시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현재 우리의 모습이 달라지는 겁니다. 박 대통령께서 경축사에서 언급한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자기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등을 본인에게 먼저 적용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 속을 살아낸 우리네 위대한 인물들의 정신을 대통령부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죠."
시인이 하얼빈 역부터 뤼순감옥까지 안중근 의사를 행적을 쫓으며 책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을 쓴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제 머릿속 영웅의 발자취를 쫓아갔는데, 정말 작고 가련한 한 사나이를 발견했다"는 말로 당시를 회상했다.
"안중근 의사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전쟁터에서 잡았던 일본군을 풀어주는 바람에 아군이 공격 받은 일도 있었죠. 그런 사람이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을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사람을 쏜 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을, 상징을 쏜 겁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람 하나 죽인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거라 여겼을까요? 일본 제국주의라는 그 시대의 상징을 저격했다는 데 중요성이 있는 겁니다. 영웅은 영웅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정신이 영웅을 만드는 거죠. 이 위대한 인물의 정신이 점점 희석되는 환경에서 적어도 (순국지 등) 팩트 정도는 정확하게 확인했어야죠. 참담합니다. 박 대통령께서 생각하시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중요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