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다수결을 의심한다'는 이처럼 다수결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그 대안을 탐색한다. 저자는 우리가 다수결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지, 정부가 국민을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 민주주의의 주요 이슈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공한다. 나아가 이 책은 다수결의 대안인 보르다 투표법, 승인 투표법, 중위 투표법 등을 친절히 소개하는 민주주의 사용설명서이기도 하다.
다수결에 따른 선거 결과와 민의는 같은 것일까? 최근 영국은 고작 51.9%의 득표로 EU 탈퇴라는 중대한 국가적 사안을 결정했다. 탈퇴파가 과반수를 넘기기는 했으나, 이는 나머지 48.1%의 민의를 모두 사표로 만든 것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원래 다수결은 64%를 넘지 않으면 제3의 안이 나왔을 때 늘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 "64%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 그 이하의 다수결 결과는 진정한 다수의 의견이 아닌 셈이다. 과반수가 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민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하다는 얘기다.
사실 다수결은 여러 의사결정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투표를 통해 다수의 사람이 가진 의사를 하나로 모으는 방법을 ‘의사결정 방식’이라고 하며, 우리는 이러한 의사집약 방식을 거치지 않고는 다수의 의견이 무엇인지 사전에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다수결에 의한 결과가 곧 다수의 의견이자 민의라고 여기는 것은 크나큰 착각인 것이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여러 후보가 나오는 선거가 되면 다수결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표가 이리저리 분산되면서 전략적 조작에 매우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수결에서는 유권자가 생각하는 1순위 후보에만 투표할 수 있을 뿐, 2순위나 3순위 후보에는 전혀 표를 줄 수가 없다. 결국 다수결 선거에서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후보자가 아니라, 일정 수의 유권자에게만 1순위로 지지를 받는 극단적인 후보자가 자주 선택된다.
"다수결 선거에서는 모든 유권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신경을 쓸수록 불리해진다. 어쨌든 이기기 위해서는 일정 수의 유권자에게 1순위로 지지를 받기만 하면 된다. 만인을 널리 신경 쓰고 싶어도 1순위로 선택되지 못하면 표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그렇게 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선거가 사람들 사이의 대립을 조장하고, 사회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동하고야 마는 것이다."(13쪽)
이처럼 다수결 제도를 채택한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후보를 선택하거나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기는커녕, 소수의 광신적 집단을 위한 정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의 한계가 아니라 다수결의 한계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제도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다수결의 함정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저자는 1장에서 다수결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하면서 “보르다 투표법”이라는 첫 번째 대안을 소개한다. 보르다 투표법은 가령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할 때, 1위에 3점, 2위에 2점, 3위에 1점을 주는 식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 합계에 따라 전체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점수제 투표법에서는 다수결처럼 ‘표의 분산’이 발생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세력이 일부 층에서 점수를 얻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낮은 점수를 얻게 되어 높은 순위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통계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투표의 진실을 캐내는 "콩도르세-영의 추정법"을 두 번째 대안으로 소개한다. 콩도르세-영의 추정법이란 각각의 후보자들 간 맞대결 다수결을 반복해 데이터를 얻고, 그 데이터에서 투표의 진실을 추정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을 쓰면 표의 분산에 의한 왜곡이 사라지며 훨씬 민의에 가까운 답을 얻어낼 수 있다. 이처럼 다수결은 알기 쉽다는 장점만큼이나 심각한 결점을 지닌 의사결정 방식이며, 그 대안들은 이미 여럿 존재한다. 우리는 다수결을 너무 당연시한 나머지 그 문제점에 대해 쉽게 눈감아왔던 것이다.
다수결의 결과가 반드시 민의는 아니며, 그것이 언제나 다수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보장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왜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하느냐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는 게 아닌가? 콩도르세는 이를 주요 논제로 삼고, 확률의 문제로 바꿔서 생각했다. 과연 다수결의 판단이 올바를 확률은 얼마나 될까?
3장에서 저자는 먼저 콩도르세의 "배심원 정리"를 통해 상식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다수의 의견이 올바를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숙의적 이성을 갖고 서로 소통하는 상태에서 투표에 참여하면 다수의 의견이 올바를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각각의 유권자들이 일반의지에 합치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일반의지는 "사람의 공존과 상호 존중을 지향하는 의지"이며, 이는 유권자가 개인만의 이익에서 벗어나 공익적 관점에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사익에 따라 투표한다면, 그것은 비록 다수의 의견일지라도 결코 일반의지일 수 없다. 각자가 공존과 상호 존중을 위해 투표한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다수의 의견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고, 소수가 일반의지에 합치되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할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다수결의 문제를 넘어서 근대 시민사회를 지지하는 근본이념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투표에 반영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사회계약, 일반의지, 인민주권, 시민적 자유 등과 같이 쉬워 보이지만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기본 개념들을 친절히 해설함으로써 대의제 선거의 한계와 가능성, 그 근본 전제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4장에서는 단지 원론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실제 대의제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을 보여준다. 정책 결정에 있어 무척 유효한 '중위 투표법'을 상세히 설명하는 한편, 민주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케네스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에 대한 오해를 친절히 풀어낸다. 나아가 저자는 일본의 개헌 논의를 비판하면서 현재의 개헌 기준이 지나치게 낮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는 것은 보기보다 쉬운 일이다. 특히 오늘날 일본은 중의원 선거에서 소선거구의 비율이 높아서, 득표율이 높지 않아도 압도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많다. 3분의 2 의석을 얻는 데, 3분의 2의 유권자는 필요 없다. 선거구가 300곳이라고 할 때, 그중 200곳에서 최다 지지를 확보하면 충분하다. 예를 들어 2014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전국 투표자 중 약 48%의 지지로 약 76%의 의석을 획득했다.”(149쪽)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흔하며, 소선구제 선거로 치러지는 다수결 선거는 이러한 난점에 노출되기 쉽다. 과반수의 지지도 얻지 못한 정당이 의회에서는 70퍼센트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다수결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개헌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으며, “64% 다수결 원칙”에 따라서 국민투표를 통한 개헌의 최소 기준이 64%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5장에서는 입법의 문제를 넘어서 행정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갖춰졌지만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실행되지 않는 현대 정치의 역설적 상황에 주목한다. 현대의 복잡한 세계에서 주권자 국민은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없기에, 입법에서는 법을 만드는 대표자를 내세우고 행정에서는 입법의 집행을 대리하는 정부를 갖는다. 그런데 정부가 갈수록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면서 국민을 배신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주권자는 입법, 행정 양쪽에 거의 관여할 수 없다. 단지 형식이 확보된 것을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라 착각할 때에만, 현행 제도는 '민주적'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이미 제도가 충분히 민주적이라 믿고 있는 사람은 이런 목소리를 불필요한 소음으로 들을 것이다."(161쪽)
저자는 일본의 "고다이라 시 328번 도로 문제"를 예로 들면서, 국민에 의해 '고용된' 정부의 배신을 제어할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모색한다. 과도한 행정 권력에 의해서 주권자 국민들의 행복권과 결정권이 침해되는 상황은 우리 역시 몸소 경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적인 행정 제도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제도적 설계를 실험하는 분야가 바로 "메커니즘 디자인"이다. 이는 경제학의 한 분야로, 게임 이론과 경제 실험 등을 활용해서 분권적 제도(메커니즘)를 설계하는 게 주목적이다. 가령 328번 도로 문제를 예로 들자면, 국민 개개인에게 도로 공사 일체에 대한 평가 금액을 묻고, 이 결과와 건설비용을 비교하여 사회 편익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행정기관이 ‘사회 전체에 득이 된다’고 홀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도로 공사 일체를 평가하면서 시민들이 직접 행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대의제의 한계를 넘어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유도하는 이러한 분권적 제도는 직접민주주의와 결합된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회 제도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다수결, 대의제와 같은 현행 제도의 관성이 아무리 강해도 이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일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면, 기존 제도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를 의심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사회 제도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책 속으로
우리는 다수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것은 언제, 무엇을 대상으로, 어디에 써야 할까? 이용상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어떨 때 다른 방법(가령 보르다 투표법)을 사용해야 할까? 다수결로 중요한 사안(가령 헌법 개정)을 결정할 때는 몇 퍼센트의 찬성이 필요할까? 혹시 가전제품처럼 설명서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13쪽)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방식은 일본을 포함해 많은 나라의 선거에서 당연하다는 듯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관습 같은 것이지, 다른 방식과 비교해서 다수결이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다수결 이외의 방식을 사고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갖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다수결을 안이하게 채용하는 것은 낡은 문화적 인습일 뿐이다. (22쪽)
선택지가 3개 이상 있을 때는 표의 분산 문제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처럼 유력한 두 후보가 있을 때도 '제3의 선택지'가 출현하면 표의 분산이 일어나 결과가 반전될 수 있다. 다수결이 다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69쪽)
루소는 민주적인 사회의 한 가지의 규범과 그 원리를 집요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그려냈다. 그렇다면 이와는 다른 사회, 가령 국민이 직접 입법을 할 방법이 전무하고 세습 정치가 횡횡하며 거대 기업이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사회의 정치 체제를 과연 무어라 해야 할까? 로버트 달은 현실의 비교적 민주화된 체제를 '다두정치'라고 부르고, 이를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와 구별했다. 우리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실제로 얼마나 민주적이며, 어떤 의미에서 민주적일까? (110쪽)
사카이 도요타카 지음 / 현선 옮김 / 사월의책 /192쪽/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