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철은 지난 3년간 한국 현대사, 특히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에 걸친 기록들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작은 1952년의 어느 겨울,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한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포로들을 포착한 베르너 비숍의 사진이었다. 1951년 이른 봄부터 1953년 여름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한국전쟁 포로들을 재교육한다는 유엔군의 명분하에 운영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수용된 포로의 규모도 규모였거니와,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 사이에 밤낮으로 자행된 유혈 살상이 극으로 치달으며 냉전이념이 첨예하게 맞부딪는 또 하나의 전쟁터로 불리던 현장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가면을 둘러쓴 포로들이 서로의 팔을 엮고 서양의 스퀘어댄스를 추고 있는 모습은 사진 한편의 자유의 여신상만큼이나 낯설고 기괴한 풍경일 수밖에 없었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의 강렬함 이상으로, 한국전쟁은 “정말로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 택한 적군을 상대로 벌인 잘못된 전쟁이었다”, “거제도에서는 모든 것이 조작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지시가 내려졌고, 사진을 찍는 우리들 앞으로는 그럴듯한 사람들만이 지나가도록 계획되었다. 이 사람들은 ‘보도 사진’에 찍히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pp.183~84)고 적힌 사진 아래 설명글은, 일상과 글쓰기에 오랫동안 무력해져 있던 작가의 온 감각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그 사진을 보고서 강한 호기심을 느꼈을 때, 나는 그 장면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 사진에 대한 관심이 이내 시들해진 까닭은, 나 자신이 사진 속 상황을 단지 이야깃거리로 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서 무의식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던 탓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문서를 대할 때마다 그럴듯한 이야깃거리인가 아닌가 하는 잣대로 가치를 재고 있었다. 진실을 찾는 건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고, 따라서 나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사진이 다시금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분명 내게 뭐라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직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제 나는 전쟁터에 나선 병사의 심정으로 아니, 전쟁터에 나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포로의 심정으로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제, 포로들의 춤」, p.185)
시간상으로 맨 처음에 씌어진 「거제, 포로들의 춤」의 주인공 ‘나’ 역시 혹독한 침체기를 겪고 있는 작가다. 3년 전 우연한 기회에 오랜 프랑스인 친구 베르티에를 통해 비숍의 사진을 처음 접했고, 그와의 인연으로 잊고 지냈던 3년 아래 대학후배인 한수영과도 재회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규칙적인 만남을 이어오던 그들로부터 돌연 소식이 끊겨 궁금해하던 ‘나’는, 한참이 흐르고 난 뒤에야 그들이 취재차 간 중국에서 자동차 사고로 동반사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베르티에의 부인 마리가 보내온 메일을 읽고 나서야 ‘나’를 포함한 우리 셋 모두에게 하나의 공통 역사가 삽입돼 있었음을,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돌연 잠적을 감췄던 한수영이 프랑스로 건너와서까지 집요하게 밝히고 싶어 했던 사실이 있었음을, 그들의 만남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한 명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의 아들이었고, 또 한 명은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인민군 포로의 딸이었으며, 남은 한 명은 한국전쟁에 징집되었다가 훈련소 철조망에 찢겨 심각한 복막염을 앓고 의가사제대를 한, 그 후 남은 평생을 전국 방방곡곡의 가시철조망을 수거하는 일에 투신한 아버지를 두었던 것이다. 죽음 직전까지 보이지 않는 철조망에 칭칭 매여 살았던 아버지만큼이나, ‘나’ 또한 육군 보병 장교로 24시간 임진강 참호 근무를 서며 느꼈던 감금된 죄수의 강박과 긴장이 오래도록 일상 자체를 잠식해온 우울과 무기력함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묻기에 이른다.
“철조망 울타리는 흔히 투명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벽이나 말뚝 울타리와는 전혀 달리, 철조망은 사람을 완전히 가둬두면서도 그 너머를 거의 투명하게 내다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거제, 포로들의 춤」, p.203)
스스로를 나태 분열증 환자로 낙인찍은 채 만성우울증에 몸을 내맡겨왔던 ‘나’는 어느 날 어두운 산책길에서 삐라 한 장을 발견한다. 반공과 간첩 신고를 부르짖는 형편없이 훼손된 그 전단에서 ‘나’는 아내와 수영의 모습을 겹쳐 떠올린다.
“지금,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바로 이 순간 막막한 공포를 가면으로 간신히 억누르며 경쾌하게 몸을 놀리는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나는 사진의 안팎을 넘나든다. 내가 포로가 되고, 또 비숍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아버지가 쓰고자 했던 소설, 한수영이 시작했던 그 소설을 계속 써나가기 위해, 이 사진 한 장이 내게 허락한 짧고 치명적인 꿈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거제, 포로들의 춤」, p.226)
가장 최근에 씌어진 「거절당한 죽음」에는 1980년대 말 경기도 연천 육군3사관학교 예비역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는 주인공 ‘최정우’가 등장한다. 화자와 실제 작가의 경험이 크게 오버랩된 작품이기도 한데, 꿈과 기억의 모호한 경계에서 서성이는 주인공 ‘나(최정우)’의 의식을 쫓는 최수철 특유의 묘사는, 점차 과거-기억-역사 속으로 입사해 삶과 죽음의 흔적이 묘연한 과거 속 인물들을 하나 둘 여기에 불러들인다. 이야기의 한 축에는 전방 사단에 배치되기 직전 특별외박을 허락받고 후배 한수영을 기다리는 ‘나’의 현재가 있다. 진눈깨비로 흐려진 터미널 앞 휴게소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그녀를 기다리던 ‘나’는 나무의자 위에서 납작한 잿빛 거미 한 마리를 발견한다.
“내가 거미에게 명령을 내려서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그때부터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시간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갔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 나는 현실로 돌아온 것일까? 나는 나 자신이 여전히 한 마리 거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몸속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술기운을 느끼며 차가운 벽에 옆머리를 기댔다. 꿈과도 같은 기억, 기억과도 같은 꿈이 내 속에서 푸르스름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거절당한 죽음」, p.48)
다른 한 축에는 한수영을 처음 만났던 3년 전 대학가 풍경이 있다. 화염병 연기로 자욱한 대학 캠퍼스, 시위대 복판 철책선 앞에서 열정적인 춤을 추는 ‘댄싱 퀸’으로 유명해져 있던 한수영은 몸 이곳저곳에 깊은 상처를 갖고 있다. 인민군 포로 출신으로 월북을 시도하다 사살된 아버지 한동일과 그의 시체 옆에서 철책선에 걸려 발견된 어린 한수영의 과거는, 이후 경찰의 끄나플이자 학도호국단장인 졸업생 허재천의 여자로 그녀를 옭아맨다.
“춤 속으로 사라지면서 너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어. 떨어져 나갈 것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꼭 남을 것만 남아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어. 나는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어.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너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너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었어.” (「거절당한 죽음」, p.56)
이렇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실재인 듯 환영인 듯 최정우의 주변을 맴도는 한수영은, 후보동기생 유도훈 등과의 술자리에서는 집창촌 여자 ‘강은실’로, 연천여관에서 함께 보내는 동안에는 그의 온몸을 파고드는 ‘거미’의 모습을 변모하며 등장한다.
한편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는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전역을 뒤덮던 2002년,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붉은악마〉들이 외치는 한목소리의 구호 위로, 50년 전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철조망에 옷을 모두 벗어 걸어놓고 빨간 알몸으로 수십 명씩 스크럼을 짜서 구호를 외치며 광장을 온통 핏물로 물들이던 포로들의 목소리가 겹치며 독자를 압도한다. 소설은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오로지 줄무늬 옷만을 입고 자란 광고기획사 직원 ‘나(최하람)’와 심리상담센터 색채심리사이자 〈붉은악마〉의 중앙사무국 운영위원인 ‘윤서강’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어머니가 내게 입힌 줄무늬는 갑옷이나 방패의 역할만을 해준 것이 아니었다. 줄무늬는 또한 감방에 달린 쇠창살이나 사냥감을 포획하는 그물의 완벽한 이미지였다. 〔……〕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겪은 끔직한 경험을 내게 들려주곤 했는데, 전쟁이 끝난 지금도 그때 겪은 일로 고통스러워했고, 그 기억은 당신의 머릿속에 완장, 계급장, 견장, 깃발, 상처, 핏줄기와 같은 다양한 줄무늬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그 줄무늬는 어머니의 가족 모두를, 그리고 마침내 남편까지 빼앗아버리지 않았는가.”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 pp.88~89)
늘 침착했지만 구호와 노래와 율동의 물결에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윤서강’은 다른 두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한수영’과 겹친다. 더욱이, 그녀의 아버지 윤치형 또한 50년 전 인민군 포로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었다. 서강과 함께 윤치형의 집에 처음 방문한 날, 줄무늬 옷을 걸친 그를 본 순간 나(최하림)는 깊은 동질성을 느낀다. 게다가 최하림의 아버지 역시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탄 파편으로 큰 부상을 입고 전쟁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했고, 정신이 안정되지 않아 영원한 전쟁 포로로 남겨진 인물이었다.
“나는 거제도에서 붉은 바다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살아나왔어. 살아나오기 위해 죄도 있었고 몸도 팔았지. 그 당시에 좌익의 빨갱이도 아니고 우익의 흰 개미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포로들을 얼룩말에서 따와서 얼룩이라고 불렀지. 나는 얼룩이었어. 말하자면 나는 빨간색 줄무늬를 입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말이야, 〈붉은악마〉가 빨간색 줄무늬를 입었으면 정말 적격이 아니었을까. 악마에게는 줄무늬가 어울리니까. 내가 바로 빨간 줄무늬를 입은 악마였거든.”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 p.111)
〈붉은악마〉의 기세가 더해가면 갈수록 서강과 윤치형의 갈등 역시 증폭해가던 어느 날, 페인트로 전면에 인공기를 그린 자신의 차와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윤치형은 돌연 사라진다. 그가 잠적하기 전 최하람에게 건네준 자료에는 195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 친공포로들과 반공포로들 사이에 수시로 벌어진 학살극의 전말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인간의 피로 깃발을 그리던 일을 내가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었을까. 딸이 태어나고, 그 아이에게 서강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찌 그 무섭고도 두려운 이름을 사랑스러운 내 딸에게 붙인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것은 속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의 발로가 아니었다. 내 속에 생긴 상처, 조금씩 속으로 아물어가는 그 상처를 두 손으로 헤집어서 밖으로 드러내고 싶은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었다. 차에 그려진 인공기 문양은, 너도 짐작했겠지만, 나한테는 죄지은 자가 가슴에 새기는 주홍 글씨였다. 나는 그 무늬를 보면서 늘 죽은 서강을 떠올리곤 했다.”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 p.163)
개인에서 사회, 사회에서 역사로 꾸준히 작품의 외연을 확장해온 작가 최수철에게 그리고 그의 독자들에게 이번 『포로들의 춤』 연작은 또 한 번의 중요한, 소설적 변곡점으로 깊게 각인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추고 있는 춤 역시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선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잠재우고, 다가오는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연극적인 기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저 경쾌한 가락이 악마의 트릴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팔과 팔로 연결되어 있는 이 남자는 결코 기만이 아니다. 그에게서 체온과 체취가 느껴진다. 이 냄새와 열기가 나와 그가 인간임을 일깨워준다. 이 절실한 느낌보다 더 진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적대감을 가질 때 인간들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철조망이 된다.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생긴다. 그러나 그 철조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담요도 누비옷도 없이 맨몸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그렇게 내 몸의 상처와 내 속의 피로 가시를 녹여버려야 한다.” (「거제, 포로들의 춤」, pp.240~41)
“베르너 비숍의 사진은 그곳에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서로가 살기 위해 서로를 끊임없이 죽여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최수철의 『포로들의 춤』은 베르너 비숍이 순간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 단지 그때 그곳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아직도 남아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 베르너 비숍의 사진기에 스며든 희미한 빛에서 발아된 최수철의 상상력은 역사와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불신과 회의의 사유를 거쳐, 오래전에 죽은 인물을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삶 속에서 고통스럽게 체화시킨다. 최수철의 손에 이끌려 영혼마저 소멸되어버리는 공포와 치욕의 수용소 광장으로 모여든 인간들은 제각각의 언어로 죽어간 자들에 대해 웅얼거리거나 고통을 견디기 위한 몸짓을 시작한다. 그것은 증언이라고도 부를 수 있고, 춤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어떤 언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공 지옥에서의 삶과 죽음이 주는 냉혹함을 견딜 수 있는 온기가 미약하지만 담겨 있다. ―서희원(문학평론가)
최수철 지음/ 문학과지성사/ 280쪽/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