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316개의 위안부할머니들 증언 모아서 소설 '한명' 쓴 김숨 작가, 더 알리고 싶었다

- 20만명이 떠났지만 2만명만 돌아온 위안부
- "사쿠(콘돔)를 빨아쓰는 것이 군인을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 "할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8월 12일 (금)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김숨 작가

◇ 정관용> 일본군 위안부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여러분 아시나요? 20만명이 떠났다가 해방 후에 2만명만 돌아왔답니다. 10명 중 1명만 살아남은 그런 셈이죠. 현재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 마흔 분, 이렇게 알려져 있는데 사실 내가 위안부였다라고 고백하지 않으신 분들도 상당수 계시지 않을까. 이렇게 또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세월이 흘러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딱 한 명, 단 한 명만 남게 되는 날 그리 먼 미래는 아닐 텐데요. 바로 그 어느 날을 시점으로 하는 소설, 제목 ‘한 명’ 이 소설이 나왔네요. 이 소설을 쓰신 김숨 작가를 오늘 스튜디오에 초대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김숨> 안녕하세요.

◇ 정관용> ‘언젠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써지지 않으면 쓸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이게 작가의 말 첫 문장이네요.

◆ 김숨> 네.

◇ 정관용> ‘한 명이라는 제목이 오고 구해지는 대로 증언록들을 찾아 읽으면서 소설이 써지기 시작했다’. 이 제목이 어떻게 왔습니까?

◆ 김숨> 작년에 제가 이 소설을 썼는데 작년에 아홉 분이 돌아가셨거든요.

◇ 정관용> 그랬죠.

◆ 김숨> 네. 그래서 그때마다 언론에 보도가 되었는데 접할 때마다 이러다가 한 분만 남는 그 어느 때가 오겠다. 그리고 또 한 분도 살아계시지 않은 그때가 오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한 명’이라는 제목이 저절로 떠올랐고 그러면서 소설이 써진 것 같아요.

◇ 정관용> 그날이 오기 전에 하루빨리 써야겠다. 그렇죠?

◆ 김숨> 네.

◇ 정관용> 제가 이 소설책을 펼쳐보면서 가장 특징적이라고 보는 게 논문집도 아닌데 소설에 각주가 막 붙어 있어요. 각주 번호가. 무려 316번에 달하는 번호가 써 있고요. 제가 뒤를 이렇게 펼쳐보니까 각종 증언록들이 대부분이네요.

◆ 김숨> 네.

◇ 정관용> 그러니까 그 할머님들이 직접 증언하신 그 내용들이 그대로 이 소설에 담겨있다, 그것 아닙니까?

◆ 김숨> 네, 증언록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객관적인 사실과 진실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소설이기 때문에 이게 또 역사적인 진실과 닿아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우선은 확보가 돼야 했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정관용> 위안소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모습들, 주사 맞고 임신하고 어떻게 낙태를 시킬지 고민하고 등등의 스토리가 쭉 펼쳐지는데 그 모든 스토리는 있는 그대로였다. 그거 아니겠습니까?

◆ 김숨> 네.

◇ 정관용> 사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님들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닙니다. 이분들이 숨기고 살아오시다가 다시 내가 그랬다라고 고백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가 되고 알려지게 됐고. 그리고 이분들을 다룬 연극도 있었고 뭐도 있었고 합니다만 진짜 이분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셨는지는 낱낱이 잘 모르거든요.

◆ 김숨> 네. 저조차도 잘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정관용> 그러니까요.

◆ 김숨> 그러니까 저희가 위안부라는 단어가 저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됐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위안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분들이 어떻게 위안부로 동원이 되었고 그리고 동원되어 간 위안소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고 그리고 또 그 이후에, 그러니까 살아 돌아와서 그 이후의 삶이 얼마나 왜곡되고 비참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소설 쓰면서 알게 됐고 그리고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 정관용> 막연히 추상적으로 ‘아, 힘드셨겠다’ 이게 아니라 그분들이 진짜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 김숨> 네, 정확하게.

◇ 정관용> 그 모습이 그려진 소설 아니겠습니까?

◆ 김숨> 네. 그래서 증언들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정관용> 증언에 의하면 어떻게들 끌려가신 거죠?

◆ 김숨> 증언에 의하면 우선 취업사기.

◇ 정관용> 취업사기. 그렇죠.

◆ 김숨> 공장,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

◇ 정관용> 대목에 보면 같이 만나는 소녀들이 ‘너 어느 공장?’ 이런 대화를 나누더라고요.

◆ 김숨> 네. 비단공장, 바늘공장 아니면 군수공장.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공장에.

◇ 정관용> 취업하는 줄 알고.

◆ 김숨> 그런데 그게 아니었죠. 그리고 또 납치.

◇ 정관용> 납치.

◆ 김숨> 네. 나물 뜯다가 아니면 우물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납치되거나 아니면 일본인 집에서 식모를 살다가 일본인의 소개로 ‘다른 더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가서 이렇게 식모살이를 하지 않겠냐’ 그런... 그것도 취업사기겠죠.

◇ 정관용> 그렇죠.

◆ 김숨> 그런 경우가 많았고 또 아니면 소설 속에도 나오는데 그러니까 기생 출신.

◇ 정관용> 기생 출신.

◆ 김숨> 권번 출신이라고 하죠. 있긴 있는데 이분들도 취업사기로 저는 끌려갔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냥 술 팔고 남자를 접대하는 곳인 줄로만 알고 갔는데.

◇ 정관용> 권번 비슷한 곳으로 간다. 일본에 있는 술집으로 간다.

◆ 김숨> 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하루에 군인을 적게는 20명 아니면 많게는 50명씩 받아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것도 저는 사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 정관용> 다들 이렇게 속아서 강제로 끌려서 가보니 ‘어? 여기가 내가 가고자 했던 공장이 아니네?’ 라는 걸 깨닫는 순간에 그 어떤 절망감. 그리고 그때부터는 무자비한 폭력이 나오지 않습니까?

◆ 김숨> 네, 그렇죠. 평균 나이가 열대여섯 살.

◇ 정관용> 그렇죠.

◆ 김숨>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리거나 11살짜리도 있었으니까요.

◇ 정관용> 11살.

◆ 김숨> 그러니까 아마 그런 소녀들이 그 폭력에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가 또 일제시대였으니까 국가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대부분이 가난한 소작농의 딸들이었거든요. 그래서 교육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랬기 때문에.

◇ 정관용> 그렇게 끌려가서 길게는 몇 년씩 위안소 생활을 한 것 아닙니까?

◆ 김숨> 네. 5년, 7년 이렇게 하신 분도 계시고 아니면 해방되던 해에 끌려가서 몇 달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돌아오신 분들도 계시고.

◇ 정관용> 여기 잘 모르는 단어들이 등장해요. ‘606호 주사, 이런 주사를 맞았다’ 이거 뭡니까?

◆ 김숨> 위안부들이 성병에 노출돼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증언들을 들으면.

◇ 정관용> 그랬겠죠.

◆ 김숨> 그런 부분이 나오는데 매독이나 임질이나 그때 맞는 주사가 606호 주사인데 이게 불임의 원인이 되는 주사이기도 하대요. 그러니까 이 주사를 많이 맞으면.

◇ 정관용> 성병 치료?

◆ 김숨> 네, 성병 치료를 위한 주사인데.

◇ 정관용> 불임이라는 부작용이 있는.

◆ 김숨> 네, 부작용이 있는 그런 주사인데.

◇ 정관용> 그러니까 사실은 쓰면 안 되는.

◆ 김숨> 안 되는 주사죠. 그래서 그 살아 돌아오신 분들 중에 자식도 낳고 사신 분들도 계시지만 불임으로 인해서 자식을 낳고 싶어도 못 낳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러니까 어떤 여성성을 거세당한 거죠, 이것도 사실.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아가신 분들.

◇ 정관용> 그게 606호 주사.

◆ 김숨> 네.

◇ 정관용> 일본말인데 ‘사쿠’가 등장하더라고요. 그게 뭡니까?

◆ 김숨> 콘돔을 사쿠라고 그렇게 불렀다고 해요. 그래서 그 업주가 나누어주거나 아니면 군인이 이렇게 가지고 오거나 그랬다고 해요. 그러니까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서.

◇ 정관용> 그런데 이걸 소녀들이 아마 빨아서 또 쓰고 빨아서 또 쓰고 그랬던 모양이죠? 책에 보면 사쿠를 빠는 게 너무 싫었다. 이런 얘기가 나오던데.

◆ 김숨> 네. 나오는데 그 사쿠를 아껴 쓰려고 업주가 강요를 했던 것 같아요. 이걸 재사용을. 그래서 그런 경우 빨아서 말려서 쓸 수밖에 없었는데 굉장히 치욕스러웠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경험을 하신 분들은 그게 군인을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라고 이렇게 증언을 하신 분도 계세요.

◇ 정관용> 하루에 몇 십개씩의 사쿠를 빨아야 하는.

◆ 김숨> 네.

◇ 정관용> 그러다 임신이 되면 또 그 얘기도 많이 소설에 등장하던데. 어떻게 했죠?

◆ 김숨> 임신이 되면 임신중절 수술을 강제로 받거나 아니면 아예 임신하지 못하게 자궁 퇴화와 함께 자궁을 드러내는 그런 수술을.

◇ 정관용> 또 위안소 안에서 소녀들이 빚을 졌다는데 빚은 왜 지는 겁니까?

◆ 김숨> 위안소에서 필요한 생활용품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 정관용> 생필품들.

◆ 김숨> 생필품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그냥 나눠준 것이 아니라 어떤 업주들의 경우.

◇ 정관용> 돈을 받고.

◆ 김숨> 네.

◇ 정관용> 돈이 없으니까 빚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 김숨> 네. 그러니까 포주처럼 어쨌든 소녀들을 위안소라는 곳에 이렇게 가둬둔 것 같아요. 그리고.

◇ 정관용> 그리고 여기 또 증언에 ‘일본이 이기기를 바랐다’ 그건 왜 그랬을까요?

◆ 김숨> 일본이 이겨야 본인들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생각이 업주들로부터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일본이 이겨야 너희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고향에.

◇ 정관용> 일본이 지면 너희들은 다 죽는다?

◆ 김숨> 죽는다, 그런 얘기를...

◇ 정관용> 고향에 못 간다?

◆ 김숨> 네, 그렇게 소녀들이 느낄 수밖에 없게 어쨌든 말들을 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업주들이.

◇ 정관용> 일부 도망친 소녀들도 있었던 모양인데 다시 붙잡아오면 발을 잘랐다고요?

◆ 김숨> 이건 한 분의 증언에서 제가 가져온 건데 이렇게 증언을 하셨어요. 그래서 도망을 쳤는데 도망을 친 소녀를 붙잡아와서 발을 자르는 그런 끔찍한 짓을 업주가 했다는 증언이 있어요.

◇ 정관용> 도망칠 엄두들도 못 냈겠군요.

◆ 김숨> 그랬을 것 같아요.

◇ 정관용> 그러니까요.

◆ 김숨> 그리고 주변에 군인들이 널려있는데다가.

◇ 정관용> 그러니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 김숨> 그래서 위안소에서 이제 아편을 할 수밖에 없었던.

◇ 정관용> 아편.

◆ 김숨> 네. 그런 증언들도 많이 있고 그리고 아니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거나 그런 걸로 악몽 같은 상황을 잊으려고 하셨던 분들이 많이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자살을 선택하신 분들도 계시고. 왜냐하면 이미 본인이 더럽혀졌다. 더럽혀진 것이 아닌데 사실은 더럽혀졌다고 생각하고 또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고향에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굉장히 수치스럽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선택을 한 분들도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 정관용> 그런 모진 세월을 버티고 2만명 돌아오셨는데 ‘내가 위안부였다’라고 그래서 등록된 분이 238명.

◆ 김숨> 네.


◇ 정관용> 그렇지 않은 또 많은 분들이 분명 계실 거고. 그렇죠?

◆ 김숨> 네. 저는 위안부 신고를 하신 분들보다 하시지 않은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우선은 저희가 정조를 강요하는, 한국 사회가 또 유난히 그렇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철저한 피해자인데 더럽혀진 죄인이라는. 그러니까 더렵혀졌다는 어떤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셨고 그랬기 때문에 본인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가족에게조차도 또 어떤 분의 경우는 어머니에게조차도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고. 그리고 또 가족들이 반대하는 경우들도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수치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수치가 아닌데.

◇ 정관용> 공개하지 마라.

◆ 김숨> 네. 그래서 신고를 못하고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 생각하면 안타깝죠.

◇ 정관용> 지금 김숨 작가와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그분들의 하루하루 삶을 이 방송을 통해 조금 들려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그냥 추상적으로 ‘이분들 아픔 잊지 말아야지’ 하지만 진짜 이분들의 아픔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알아야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김숨> 냉정하게 또 냉철하게 알 필요가 있지 않나.

◇ 정관용> 그렇죠. 이분들은 자기가 아무리 말로 해도 자기 몸으로 겪어낸 고통을 이해받을 길이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신다고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도 어느 분의 증언입니까?

◆ 김숨> 네, 증언에서 따온 건데. 기억을 호명해서 증언들을 하시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들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 정관용> 고통스럽죠.

◆ 김숨> 기억들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꺼내서 세상에 이렇게 말로 알리는 그 행위 자체도 굉장한 고통일 것 같아요, 그분들께는.

◇ 정관용> 또 그렇게 말로 해도 사람들이 제대로 못 알아듣고.

◆ 김숨> 네. 믿지 않고. 그런데 그 기억이 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경우에 육체에 아물지 않은 흉터처럼 저는 새겨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떤 몸의 기억들이기도 한 것 같거든요.

◇ 정관용> 그렇죠.

◆ 김숨> 그래서 그 증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소설 속에 끌어온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이 책을 들고 아마 눈물 찍으면서 읽을 많은 독자들께 한 말씀만 마지막 해 주시죠.

◆ 김숨>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 이렇게 조금이라도 더 이렇게 알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면 그걸로 그냥 몫을 다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정확히 제대로 알아야 또 우리가 할 일이 떠오르겠죠.

◆ 김숨> 네.

◇ 정관용> 김숨 작가. 소설 ‘한 명’ 들고 오신 김숨 작가 함께 만났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 김숨>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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