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국·공립 오케스트라 여성 예술단장, 보스톤 심포니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 등. 성 단장은 성별 구분 없이 지휘자의 자질로만 평가받고 싶어 하겠지만, 여성에게 유독 배타적인 지휘계에서 그가 걸어온 길은 '최초'가 됨으로써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성시연 단장에게 ‘최초’라는 꼬리표는 어쩔 수 없는 (실력 있는 여성 지휘자로서) 업보라고. 하지만 ‘업보’라는 단어보다, 그는 그저 ‘도전’했을 뿐이고, ‘최초’는 단지 그 결과였다. 그래서 성시연 단장에게는 ‘최초’보다 ‘도전’이라는 수식어가 더 적합하다.
그는 이번에 또다시 도전을 감행한다. 국내 오케스트라 중 최초로 ‘인공지능’이 작곡한 곡을 연주한다. 마치 이세돌이 알파고에 도전했던 것처럼.
오는 10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모차르트 vs 인공지능’ 연주회를 채 1주일도 안 남은 때, 한창 바쁠 성시연 단장을 만나 인공지능의 곡을 연주하기로 도전한 이야기 등을 나눴다.
다음은 1문 1답.
= 장 담그기로 비유하면, 숙성이 되면서 좋은 맛을 우려내는 듯한 시기같다. 단장이나 예술감독의 임기가 보통 2~3년이다. 무언가 이루기에는 시간이 짧다. 내게 첫 2년은 준비 기간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기간이었다. 지금 2년은 숙성되는, 더 좋은 유산균 같은 에너지들이 발산되는 기간이 아닌가 싶다. 나와 단원들의 궁합이 맞아지고 있다. 이번 2년이 지나간다면, 지금보다 성숙한 우리를 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 2014년 1월 국공립 오케스트라 사상 첫 여성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목표 3가지(해외투어, 초청공연, 음반녹음)를 세웠었다. 3가지를 다 이룬 소감과 2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목표가 있나.
= 하나 못 이뤘다.(웃음). 내가 세운 목표 중 해외투어와 음반녹음은 이뤘고, 나머지 하나는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신년·송년 음악회에 경기필이 초청됐으면 했다. 보통 서울 중심에 있는 오케스트라들이 협업하고, 지방 오케스트라에는 기회가 없어 목표로 세웠었는데, 이루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이번 2기 목표는 데이터로 볼 수 있는 좋은 결과물을 갖는 것이다. 예술을 결과물로 판단하기는 사실 어렵다.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감으로 마음 속에 전달되기에, 숫자나 데이터로 프레젠테이션하기 힘들다. 경기필은 지금 상당히 잘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 경기필의 모습 자체로도 좋아해 주신다. 그럼에도 티켓 판매라든가, 경기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수치로 나타났으면 한다. 경기필이 한다 그러면 이슈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또 클래식계를 선도적으로 주도하면서 발전하는 오케스트라구나라는 리뷰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이다. 이 자리는 내게 주어진 시험대였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 오케스트라가 발전하느냐 후퇴하느냐는 지휘자의 역량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부족해서 이 오케스트라에 채워줘야 할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면 어떡하나,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면 어떡하나 등 걱정이 많았다.
그 다음으로 2년간 일하면서 치고 나아갈 부분이 있으면 과감하게 나아가야 하고, 포기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게 내게는 힘든 점이었다. 2년의 임기가 주어졌을 때 이루고 싶은 욕심과 목표가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까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 성 단장 취임 이후 경기필에 대한 평단 칭찬이 자자하다. 단기간 음악적 성장을 이끌어 낸 비결이 있는지.
= 리더십이 제일 중요하다. 내가 리더십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을 하나로 모아야 수많은 사람이 같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갈텐데, 이 생각을 어떻게 모으느냐가 중요하다. 때문에 일단 내 자존심 같은 것은 다 제쳐두고 '경기필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경기필에 유익할까', '나중에 먼 미래에서 돌아봤을때 무엇을 해야 많은 흔적을 남긴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을까' 등, 그런 고민을 했다. 내 이익이나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경기필만의 뚜렷한 정체성과 가야 할 방향을 내가 먼저 보길 원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 큰 트러블 없이 잘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거장들이나 유명한 분들의 CD나 레코딩 등을 듣고 자란다. 그러면서 그분들은 우리들의 우상이 됐다. 우상처럼 보고, 흠모하던 사람이 나와 같이 음악을 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리카르도 무티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 지휘자 중 한 명이고, 그의 음악을 얼마만큼 더 접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마에스트로가 경기필에 와서 단원들과 교감하고, 음악을 전수해 준 것은 큰 도움이 됐다. 오케스트라가 성장하기 위해선 많은 요건이 필요하지만 좋은 뮤지션들(지휘자, 연주자)과 같이 음악을 하면서, 음악적 아이디어를 나누는 것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나뿐만 아니라 단원들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된 것 같다.
▶ 성 단장도 원래 무티의 팬이었나.
= 사실 난 무티의 팬이 아니었다. 무티가 이태리 오페라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1인자이지만, 성격적으로 까다롭다고 들었다. 그런 모습들이 나의 아이돌상에 일치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보니 유머러스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더라. 심지어 우리와 함께하던 중에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지?”라고 얘기하는 모습이 소탈한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 나도 팬이 됐다.
= 3B(베토벤, 바흐,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감성이 풍부한 곡 위주로 듣는데, 나는 현대곡 쪽으로도 도전을 많이 한다. 작년에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를 했었는데, 반대가 많았다. 오라토리오는 합창단과 성악가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합창단에서 기획하는 것이지 오케스트라에서 할 기획 연주가 아니라고 얘길하더라. 사실 멘델스존이 작곡할 때 이건 합창단이 해야 하는 곡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 고정관념 자체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외에 한 가지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 갔어야 했던 게 관객 동원이었다.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었는데, 2300여 석이 되는 객석을 어떻게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로 채우나, 인기 있는 레파토리가 아니고 3시간이 넘는 공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안 올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해보자고 했다. 잘되면 감사한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남들이 안 하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경기필이 그런 시도를 하는 이유는 다양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지나치게 획일적이다. 외모도 비슷하고 유행도 다 따라하고, 생각하는 사고나 교육적인 면도 획일적이다. '이것만 먹어'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차려주고 본인이 골라먹게 해주는 게 국공립오케스트라의 의무라 생각한다. 항상 한 발 먼저 나아가서 더 많은 다양성과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 음악을 통한 세대공감 프로젝트도 눈에 띈다. 키즈콘서트, 청소년음악회, 시니어콘서트 등을 선보이는 이유는.
=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고 싶다. 신년 콘서트 같은 경우도 국내에서는 단발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국공립오케스트라에서 시리즈로 몇 년간을 정성 들여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먼 미래를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니어콘서트는 시니어의 문화적 공간이 부족해서이다. 그분들이 모여서 문화를 나누고 향유하는 공간이 드문 것 같다. 시니어의 가슴을 울릴만 한, ‘당신은 정말 값진 분’ ‘일상에서 물러나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당신은 소중하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매번 던져드리고 싶다. 정말 축 처진 부모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기획했다. 날이 갈수록 퀄리티도 높아지고 있고,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워지고 있다. 사실 경기필 단원과 나, 기획실 모두 한 푼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로 공연에 임하고 있다. 그만큼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사회가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특히 소외 계층의 시니어들이 많은 것 같아, 그런 분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다.
= 나는 항상 경기필이 대중적인 오케스트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한 레파토리는 사람들이 생소하다,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공연을 봤을 때 대중의 요구와 필요를 채워주는 오케스트라다라는 소리도 듣고 싶다. 경기필이 더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알려지는 오케스트라가 되고 싶다.
어떻게 하면 경기필을 더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어느 날 아침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눈에 띄었다. 인공지능이 침범할 수 없는 게 예술 영역이라는 리서치까지 나오고 그랬다. 우리가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배틀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비교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로봇이 피아노를 치는 것은 있지만, 인공지능이 작곡한 곡을 실제로 연주한 단체는 없는 것 같아서 우리가 해보자며 기획하게 됐다.
나는 아이디어만 던졌고 기획실에서 여러가지를 찾아 봤다. 그러다 데이비드 코프라는 교수가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개발을 해서 작곡가의 형상으로 이미 발매도 하고 유튜브에도 많이 올린 것을 보고, 지금의 형태로 해보자고 결정했다. 이 기획을 결정한 지 얼마 안 돼서 <워싱턴포스트>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대응을 빨리 안 하고 하루 이틀 정도 있다가 답변을 줬는데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아쉬웠다. 그만큼 이슈를 불러올 수 있을 정도의 공연인 것 같다.
▶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창조의 영역을 넘보는 인공지능.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지.
= 인공지능이 작곡한 곡을 들어봤는데 솔직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훌륭하다. 들으면 부족하다 아쉽다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음악 애호가가 아니라면 구분하기 어렵다. 공연 당일 모차르트와 인공지능의 곡 중에 무엇이 더 아름다웠는지 묻는 ‘블라인트 테스트’를 하려 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
= 경기필이 잘한다,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것도 좋지만, 사실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직접적인 감동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그것이 우리 경기필의 목표가 됐으면 좋겠다. 소수가 모이는 곳에 가서 연주를 하더라도 그분들의 삶에 영감을, 감동과 위로를 주는 오케스트라가 됐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있는 동안은 최우선적인 목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