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사랑할 때 우리가 속삭이는 말들'의 저자 대리언 리더는 사랑, 섹스에 대한 남녀 간의 태도의 차이와 그로 인해 발생되는 갈등을 통해 사랑의 언어에 감춰져 있는 남녀의 욕망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시인들은 사랑을 꿈에 비유하곤 하는데, 여기에는 언젠가 끝나는 꿈처럼 연애도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물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는 말이니 사랑이 종지부를 찍는 방식이 어떻게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에 반영되는지도 앞으로 살필 것이다. 연애 초기에 연인끼리 주고받는 약속은 연애 말기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일종의 암시가 될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중요한 약속은 관계를 시작할 때와 자포자기하며 관계를 끝낼 때 이뤄지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그때마다 상처받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남성이 사랑한다고 맹세하면 더 불안해진다고 덧붙였다. 남성의 침묵에 대한 의혹은 일단 그가 말로 꺼내면 몇 배로 커질 뿐이다. 결국 약속은 결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니, 애초에 약속이 없었다면 헤어질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환상이 깨질 수 있다면, 본인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어차피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애를 시작할 때 약속을 하는 게 아닐까? _본문에서(16~17쪽)
연인이 되려면 우선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의 확인과 맹세가 필요하다. 이 관계의 첫 걸음부터 남녀에게 약속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관계를 시작할 때 약속이나 요구를 하는 쪽은 대개 남자들이다. 여자들의 경우, 직접 사랑을 고백하라는 조언보다는 남성에게 고백을 받아내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나는 저 여자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남성의 사랑이 시작된다면, '나는 저 남자를 사랑하기가 두려워'라는 생각에서 여성의 사랑은 시작되곤 한다. 또한 여성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주는 것을 동일시하기에 사랑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이 철저히 부정당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남성은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연인 사이에서 대화로 주고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말을 뭐든 할 수 있으나 여성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침묵을 택하기도 한다. 즉, 여성은 발화되지 않는 약속, 다시 말해 연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 남몰래 약속하는 경우가 많은 셈이다. 연애의 시작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불균형은 결국 여성의 정체성 문제와 이어진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나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은 전처나 어머니처럼 남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른 여성의 자리를 대신 차지함으로써 하나의 정체성을 마련하기도 한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누군가 다른 사람과 관련되거나 타인에게서 이미지를 빌려올 뿐이다. 그렇기에 애인 혹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떤 여성들은 일정한 간극을 마련해두며,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을 조성해 ‘나는 그 남자에게 무엇인가?’라는 식의 의문을 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간극에서 존재 의미를 찾기도 한다. 결국 여성은 연애를 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여성은 연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로 아무 남자나 사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바로 이런 경우다. 이는 매우 기이한 균형으로 이어진다. 남성이 하는 사랑의 약속은 그가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다는 증거이자 그리 좋은 징후가 아니지만,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여성의 약속은 사랑 자체보다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여성의 이러한 약속은 다짐이라고 하는 편이 적확할 수도 있다. 약속은 크게 소리내어 말하나, 다짐은 조용히 결심하니 말이다. 여성은 늘 말이 많다는 통념은 바뀌어야 하며, 아프로디테 같은 그리스 여신들이 성정뿐만 아니라 침묵 때문에도 찬양받았음 또한 유념해야 한다. 찰스 1세가 반대파 수장들을 잡고자 나섰을 때 왕비가 이 정보를 함구하지 못하고 칼라일 부인에게 비밀을 털어놨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위험한 수다의 이면에는 늘 여성이 절대 말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_본문에서(33~34쪽)
모든 역사에는 그보다 오래된 역사, 즉 새롭게 재현되고, 어쩌면 다시 구성되며,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가 따르게 마련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작은 비극을 재현하기 위해 사랑이 끝난 후 새로운 상대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한다.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약속을 한다고도 하나 사실 이는 미래에 대한 무지보다 과거에 대한 무지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다. 만약 사랑이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이전 연인과의 관계 같은 과거를 토대로 한다면 이는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사랑의 시작은 사랑의 끝에 어떻게 반영될까?
사랑하는 상대를 선택할 때, 우리는 부모 혹은 과거의 중요 인물에게 느꼈던 감정을 현재의 누군가에게로 전이시킨다. 연애의 근원에는 항상 실패했던 연애,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연애가 자리하는데 그 기원은 부모와의 관계다. 남성의 경우, 어머니와의 '동일성' 때문에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는 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여성의 경우에도 말투나 머리색, 음색 등 부모가 지닌 특징이 사랑의 시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데, 사랑이 끝나는 순간에도 이는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연애를 시작할 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상대의 세부사항이 연애가 끝날 때는 혐오스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별하게 되는 계기에도 남녀 간의 차이는 존재하는데, 남성은 여성의 월경 같은 생리 현상이나 여성 또한 욕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기 두려워해 도망친다면, 여성은 자신이 신봉하는 이미지를 남성이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 그에게 실망하여 파국에 이른다.
약속은 흔히 맹세나 선서, 다짐처럼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는 수행성을 지닌 행위로 여겨져왔다. 모든 말은 사실 무언가를 하는 것이기에 결혼 서약처럼 어떤 말을 입 밖에 꺼내면 구속력이 발휘되며, 그렇게 말함으로써 좋든 싫든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연인들은 상대가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기를, 거짓이 아닌 진실된 약속을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상대의 거짓말이 드러났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성들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는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이 그에게 진실된 말을 듣게 되는 단 한 사람이기를 바라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연인과의 관계를 쌓아간다. 하지만 연인관계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굳게 약속한 사랑이나 정절보다는 절대적인 본질을 가진 환상이 더 오래가는 법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실제 연인과는 다른, 소속감을 느끼고 정절을 바치는 믿을 수 있는 대상이 따로이 존재한다. 연인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각자 품은 환상 속의 대상이 우리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보장해주며,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할 때 연인들이 많은 말을 주고받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그 확실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이 지나치게 성급한 행동을 할까봐, 행동에 옮기고도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못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까봐 걱정한다면, 남성은 대개 행동하지 않고 미루고 기다리는 생명체다. 라캉은 심지어 한 세미나에서 신경증을 주체와 시간의 관계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주체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한 박자 빠르게, 또는 한 박자 느리게 나타나는데, 둘 다 손에 닿지 않기는 매한가지로 지나치게 빠른 경우는 히스테리, 지나치게 느린 경우는 강박증에 해당한다. 여성은 남성과 연애를 시작한 후, 좀더 기다렸어야 했다거나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니라며 불평한다. 반대로 남성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일단 알맞은 사람을 찾으면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데이트 약속 등을 잡기 위해 적절한 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고 불평한다. 두 경우 모두 욕망이 얼마나 핵심 요소인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계속해서 욕망을 드러내려 하며, 욕망이 붕괴되게 위협하는 것이라면 뭐든 반드시 뒤로 미루려 한다. 따라서 소망의 내용과 소망의 역할은 다르며, 소망의 역할은 계속해서 주체가 욕망을 발휘하게끔 허용하는 것이다. _본문에서(298쪽)
대리언 리더 지음 /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340쪽 /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