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살을 가장 많이 붙이기도 했고, 가장 영화적인 캐릭터가 김장한이 아닐까 싶네요. 덕혜옹주를 평생 동안 지키는 그 동력이 뭘까 고민했어요. 덕혜옹주와의 약혼 실패가 장한의 뿌리 같았습니다. 일본으로까지 군인으로 위장해서 간 것은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것도 있죠. 그 두 가지가 장한이 드라마를 풀어가는 힘이고, 덕혜를 향한 최초의 지점이라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의 관계에 격정적인 로맨스는 결코 없다. 그저 애정과 충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이어질 뿐이다. 깨어질 듯, 말 듯한 두 사람의 관계는 남녀의 애정보다는 정신적 사랑에 가깝다. 그것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느냐 물으니 박해일은 고개를 젓는다.
"허진호 감독님이 두 사람의 관계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 미묘하고 매력적이에요. 감독님 전작에 등장하는 두 남녀를 다루는 방식이 항상 그렇더라고요. 어떤 적절한 거리가 있는 미묘한 감정들. 그것이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김장한이 덕혜의 모자를 살짝 내려주고 옷깃을 정리해주는 부분이 있어요. 정말 짧고 단순한 순간인데도 인물과 인물이 보여주는 정서를 끄집어 내더라고요."
허진호 감독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 걸출한 로맨스 영화를 만들어 낸 인물이다. 이번 촬영을 위해 박해일은 허진웅 감독의 전작을 연구했다. 감독이 배우의 작품을 보듯이 배우 역시 감독의 작품을 보며 도움이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오히려 '덕혜옹주'가 허 감독님 필모그래피에서 좀 다른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8월의 크리스마스'는 5분 짜리 장면을 찍는데 스무 번 촬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날은 그거 한 장면 찍고 끝났대요. 그런 영화들이 많았던 시대죠. 갈수록 감독님이 시대적 흐름이나 영화의 패턴 그리고 관객의 선호도를 감안하는 것 같고 개봉하는 시즌이나 이런 지점도 고려해서 이번에는 다른 톤으로 갔다고 봅니다. 촬영은 되게 리듬감 있었어요."
"저는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나이 든 김장한에 대한 첫 인상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 들일까 고민이 깊었어요. '은교'에서 한 번 제대로 해봤기 때문에 확실히 분장을 받았을 때 예민하거나 불편한 건 없었네요. 배우는 어차피 감정으로 배우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거니까 그 부분이 더 집중하기는 좋았던 것 같아요. '은교' 때도 다시는 하지 말까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게 참 사람 일은 모르는 것 같아요. 결국 작품에서 매력을 느끼고, 또 필요하다 싶으면 하겠죠."
허 감독은 박해일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박해일은 그것을 풀어 나가야 했다. 그는 '철학과'를 나온 감독의 성향 탓이라고 즐겁게 웃었다.
"전공이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감독님은 디렉팅을 할 때, 김장한이 어떻게 행동할 지 다 던져 봐요. 배우들에게는 생각을 많이 하게끔 하죠. 대체적으로 배우가 하는 대사를 존중하고,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배우가 편안하게 느끼는 순간을 많이 가져가는 것 같아요."
가장 호흡을 많이 맞춘 파트너 손예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다. 박해일은 '덕혜옹주' 전작인 '비밀은 없다'에서 손예진이 보여준 연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밀은 없다' 이후에 (손)예진 씨가 변곡점을 찍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 전에 많은 관객들이 예진 씨의 매력을 많이 즐긴 것 같은데 깊이와 묵직함이 더 추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덕혜옹주'에 대한 어떤 지점을 준비하고 있는 단단한 마음이 보이더라고요. 나도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예진 씨 걱정은 전혀 안 하고 제 걱정만 했어요. 예진 씨 체력이 진짜 좋아요. 굽 있는 신발을 신고도 숲 속이랑 해변가를 정말 잘 뛰기도 하고…. 어릴 때 뭐하고 놀았냐고 했더니 육상했다던데요? 심지어 먹기도 잘 먹고. 보면서 어떻게 관리를 그렇게 잘하는지 놀랐어요."
"장한은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고, 덕혜는 '왜 이제 왔느냐'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덕혜 방향과 제 방향을 나눠서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서로 그 감정을 유지하려고 빨리 좀 찍어 달라고 스태프들에게 재촉을 많이 했었어요. 감정이 괜히 늦게 올라 오니까 괴롭혔던 것 같네요. 사실 그 전에는 계속 절제하고 하다가, 그게 유일하게 감정을 보여주는 장면이었거든요."
실존 인물을 극화시킨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예고편에서 덕혜옹주가 조선인들 앞에서 연설단에 오른 장면부터 '역사 미화 논란'이 일었다. 박해일은 이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내놓았다.
"역사적 사실과 극화된 영화와의 비교가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영화를 관람한 후에도 그런 기분이 들면 좀 더 이야기를 해봐야 될 것 같고요. 이전까지 한국 영화들은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다양한 장르로 영화를 풀어왔고, '덕혜옹주'도 그 안에 있는 작품 중의 하나죠. 거기에 주시는 좋은 관심이라고도 보입니다."
박해일은 온전히 작품으로만 팬들과 소통하는 배우 중의 한 명이다. 요즘 배우들처럼 SNS를 통해 소통하고픈 생각이 없냐고 묻자 '메시지 보내는 그런 거죠?'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저는 그런데 지금 작품 하나로도 되게 힘들거든요. 현재로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밀은 없다'로 변화를 맞이한 손예진처럼 박해일 역시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은 어떤 배우든지 꿈꾸는 순간이다. 심지어 그것이 박해일처럼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는 배우이더라도.
"김장한이라는 캐릭터가 여지껏 해왔던 작품 중에 제 노하우를 집약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여지가 컸던 캐릭터였어요. 그리고 나서 또 새롭게 나를 탐구하고, 도전해보자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은 아닌 것 같고, 저 또한 어떤 지점으로 다시 가는 단계가 되기를 바랐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