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검장 출신으로 최근 대기업 수사를 변호하고 있는 A씨는 그동안 후배 검사들과 종종 식사 자리를 가지며 우의를 다져 왔다. 후배 검사들은 A씨를 현직 때와 같은 수준으로 예우한다.
좋게 보면 선후배 사이의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지만 한편에서는 '스폰서'라는 곱지 않은 말이 나오고 있다. 밥값은 그때 그때 다르다고 하는데 3만원이 넘으면 김영란법을 어겼을 가능성이 높다.
김영란법은 원활한 직무 수행이나 사교·의례 또는 부조의 목적으로 제공되는 음식물은 수수를 금지하는 금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예외를 두고 있으나 시행령안은 그 가액을 3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설령 3만원 이하의 식사를 했더라도 원활한 직무 수행이나 사교·의례 또는 부조의 목적을 벗어난 것으로 판단되면 김영란법을 위반한 것으로 본다.
검찰 출신 변호사와 현직 검사가 만나 식사를 하더라도 밥값은 일인당 3만원 이하여야 하고 사건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황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김영란법을 지키려면 후배 검사들을 챙기고자 하는 전관 변호사들의 행동반경에도 적지 않은 장애물이 등장하는 셈이다.
정부 관계자는 "앞으로 전관 변호사와 현직 검사가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식사 자리를 갖기는 어려워질 것이다"며 "서로 서로 조심하지 않겠느냐"고 예상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지난달 29일 기소된 진경준 전 검사장도 김영란법을 적용하면 혐의가 추가된다.
이를테면 진 전 검사장은 지난 2005∼2014년 미국과 일본 등으로 11차례 해외여행을 하면서 김정주 NXC 회장으로부터 여행경비 5000여만원을 제공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김영란법은 직무 관련성 여부나 기부 후원 증여 등 명목에 관계 없이 동일인으로부터 한 차례 100만원 이상 또는 매 회계연도에 3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받으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진 전 검사장이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김 회장을 '스폰서' 삼아 대가성 없는 여행경비를 받았더라도 김영란법은 금품을 제공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브로커였던 이민희씨로부터 정 전 대표 구명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전직 판사 L씨도 김영란법의 사정권에 포함될 수 있다.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구속기소된 정 전 대표의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L씨는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이씨로부터 접대를 받는 등 구명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지난 5월 사직서를 냈다.
김영란법은 공직자가 최초로 부정청탁을 받았을 경우 거절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동일한 부정청탁을 받으면 소속 기관장에게 신고하도록 했다.
L씨가 사직하면서 구명로비 의혹은 없던 일처럼 됐지만 L씨가 유명 브로커인 이민희씨와 2년 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영란법에 포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민희씨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점 등을 앞세워 홍만표 변호사에게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변호사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지난 6월 20일 구속기소됐다.
이씨는 홍 변호사와는 현직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을 뿐 아니라 여동생이 운영하는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홍 변호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을 접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란법은 수수 금지 금품의 예외 중 하나로 동창회 소속 구성원 등 공직자 등과 특별히 장기적 지속적인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자가 질병 재난 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공직자 등에게 제공하는 금품을 꼽고 있다.
다만 고향 친구나 학교 직장 선후배 등 단순한 지연 학연 혈연 등의 관계가 있다는 사정만으로 특별한 친분 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별히 개인적인 친분도 없으면서 고교 선후배라는 명목으로 안면으로 튼 뒤 음식물 주류, 교통, 숙박, 초대권, 입장권 등의 금품을 주고 받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같은 김영란법의 취지를 홍 변호사의 현직 시절에 대입하면 위법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