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제품을 사용한 뒤 병에 걸렸어도 여전히 피해 입증은 고스란히 피해자들의 몫이다.
올해부터 환경보호피해에 관한 구제법이 시행됐지만 여전히 법에 사각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피해자들은 병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오늘도 발버둥 치고 있다.
◇ "나는 어머니 죽인 가해자"…매일 밤 악몽
류 씨는 "어머니가 숨을 쉬기 힘들어하자 가습기에 살균제까지 넣어서 더 가까이 대고 틀었다"면서 "나는 피해자이면서 어머니를 죽인 가해자"라며 고개를 떨궜다.
류 씨와 그의 어머니는 지난 2013년 정부에서 실시한 1차 가습기살균제 피해조사에서 4등급 판정을 받았다. 문제의 제품을 사용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 때문에 병에 걸린 건 아니라는 것.
류 씨는 피해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병원을 바꿔가며 건강검진을 받았고, 건강보험공단에서 지금까지의 진료내역을 떼어 등급 심사위원회에도 건넸다고 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국회 가습기살균제 국정조사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피해보상을 주장하고 있다.
2005년 호흡기에 처음 이상증세를 느껴 병원을 찾은 류 씨는 "당시 담당 전문의도 가습기 살균제 성분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면서 "일반 소비자가 직접 피해를 입증하기엔 너무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정부가 재벌기업 등 1%를 위해 있는 것 같다"면서 "나머지 99%는 개돼지처럼 죽으라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 '잃어버린 10년'…몸과 마음 지쳐 입증 포기
'다른 기저질환이 피부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심사소견을 받은 박 씨는 이후 스스로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박 씨는 연구자들의 자료와 논문을 검색해 문제의 성분이 피부질환과 면역계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서양의학을 잣대로 들이대는 정부와 기업에 맞서 한의학에까지 손을 뻗었다. 박 씨는 "한의학에선 인체가 폐로만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도 호흡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입증이 어려워 재판 심리가 열려도 원인규명미비로 인해 재판이 연기되기 일쑤였다.
설사 피해가 입증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게 박 씨의 주장이다. 그는 "10년 동안 싸우면서 가족 내 불화로 해체된 가정을 주변에서 수없이 봤다"면서 "매일 떠올리게 되는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중간에 합의하는 피해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 관련법 있어도 "여전히 입증책임은 피해자 몫"
지난 2012년에 터진 구미 불산 가스 누출사고를 계기로 '환경오염피해 배상책임 및 구제에 관한 법률(환경오염구제법)'이 올 1월부터 시행됐다. 하지만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조홍식 교수는 "환경오염구제법이 제정된 이후 민사상으로 피해자가 입증해야했던 책임이 가해자에게로 넘어 갔지만 법조항에 명시된 범위만 포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환경오염구제법 제2조에 따르면, '환경오염피해란, 시설의 설치·운영으로 인해 발생하는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 해양오염, 소음·진동,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원인으로 인한 피해'에 한정돼 있다. 일반 화학제품 사용으로 인한 피해는 여전히 피해자가 입증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임상혁 소장은 "환경오염구제법은 적용 대상이 '시설물'에만 국한돼 있다"면서 "가습기살균제와 같은 화학제품을 사용해 피해를 입어도 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관련법 제3조엔 '이 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시설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시설을 말한다'고 명시돼 있다.
결국 개인의 입증 책임을 기업이나 정부로 전환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법이 피해자가 병을 얻게 된 개연성의 범위를 더 폭넓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기업과 정부도 책임감을 가지고 제품을 생산하고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